읽고 배우고 쓰라는데

2013년 12월 10일

by김광희

작년 8월. 수술 일정에 맞춰 예약된 병원 입원을 앞두고 집 대청소를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오래전 아이 출산을 앞두고도 그랬다.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구석구석 치우던 때를 생각하면 이번 청소는 손가락 몇 개만 있으면 충분했다. 먼저 안방을 열어젖혔다. 청바지만 가득 찬 옷장 문을 열어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돌아가신 친정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신혼여행 후 친정에서 하루 묵고 시댁으로 가던 날.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택시 문을 잡고 ‘옷이라곤 청바지밖에 없던 네가 결혼했다고 원피스를 입다니.’ 그래서 예쁘다는 말은 줄인 채 친정엄마는 조심히 가라며 택시 문을 닫아줬다. 이건 다 자기를 만나서라고 으쓱거리던 남편과 손을 흔들던 친정엄마는 떠나고 청바지만 남아있는 옷장. 나는 유행이 지난 몇 개를 끄집어냈다. 옷장 안이 겨울나무처럼 휑했다.


그때 이틀에 걸쳐 정리정돈을 했었는데. 1년도 안 되어 구멍이 메꿔졌다. 채우지 않겠다 했지만, 복부 흉터가 단단해질 무렵부터 헐렁한 옷장이 눈에 밟혔다. 덕분에 겨울 날씨 같던 곳에 내 욕심 같은 봄이 자리를 다시 잡았다. 갖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걸 보니 몸과 마음이 살만해진 거다. 나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먹거리며 안방 옷장 문을 열려다 다시 닫았다. 이젠 더 이상 채우지 말아야지. 아니다. 날씨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비워야지. 무엇을 치워버릴까?


정남향인 집으로 강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안방 옆에 있는 방으로 갔다. 바카라장을 둘러봤다. 햇빛에 탈색된 바카라이 서너 권 보였다. 그중 한 권을 빼냈다. 몇 번이나 정리를 했는데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건 사연이 있는 바카라일 거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바카라을 펼쳤다. 날짜와 함께 글이 적혀있다. 맞다. 그해 12월 첫 주말. 가톨릭 성직자를 꿈꾸던 제자 녀석과 강진군 성요셉 고등학교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만났던 교장 수녀님이 녀석에게는 성서를 내게는 이 바카라을 주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쥐고 있던 바카라이었던 거다. 바카라장 앞에 쪼그려 앉아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바카라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바카라 앞에서 머뭇거리는 당신에게』

(부제: 후천적 활자 중독에 빠지는 3가지 방법) 작가: 김은섭

내가 쓴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 속에 내가 들어있다. 그러니 읽고 배우고 쓰라.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저자는 이 바카라에서 읽고 배우고 쓰라고 한다. 다독은 아니지만 쉬지 않고 바카라을 읽어온 나는 지금까지 바카라 속에서 무엇을 읽었으며 무엇을 배웠나? 쓰기는? 일기도 제대로 쓰지 않으면서. 그래도 이렇게 긁적이는 것 정도는. ㅎㅎ 배가 불러도 늘 껄떡거리던 내가 무엇을 먹고 싶어서 그랬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지금까지 산길을 가느라 덜컹거렸던 삶이 드디어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고속도로를 마주친 기분이다. 아! 커피 맛처럼 쓰디쓴 일상에 아이스크림 같은 단맛을 보다니. (2013년 12월 10일)


묵은 종이 냄새와 연필로 쓴 글이 제법 어울렸다. 교장 수녀님이 내려주던 드립 커피 맛을 떠올리며 바카라을 읽었던 기억도 났다. 바카라을 읽고 난 후 쓴 글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던 나를 발견하다니. 코끝이 찡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실행하지 못했다. 게으른 탓에 읽고 배우는 것을 더디게 하느라 쓰기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바카라과 함께 바카라꽂이 구석에 꽂아버렸다. 신부가 되겠다던 녀석도 수도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로부터 10년도 훨씬 지나 퇴직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쓰기를 끄집어냈다. 누렇게 변색한 종이처럼 서랍 한편에 숨겨두었던 삶을 꺼내 들었다. 마치 내가 투명한 통유리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쑥스러움에 도망치려는 자음과 모음을 잡아들여 글을 썼다. 완성된 글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지금 보다 훨씬 젊었을 나와 그들이 보였다. 춤을 추듯 써 내려간 글과 함께한 시간 동안 딱딱하게 굳어있던 세월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촛농이라면 다시 굳었을 건데 다행히 연기가 되어 날아갔다. 다들 그래서 글을 쓰나 보다. 살포시 나를 보여주다 때론 오물을 뒤집어쓰기도 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글을 쓰는 건 그곳에 여전히 살아있는 내가 있어서겠지.


읽고 쓰고 배우라는 김은섭 작가님의 문장을 들여다보다 욕심 덩어리인 나를 들켜버렸다. 쌓고 쌓아 꽉 채운 공간이 부끄러웠다. 나는 비굴한 미소를 띠며 비우는 일을 잠시 미루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변명 같지만, 이제 제철을 만난 옷은 종종 입어야 할 테고. 바카라장 속 밑줄 쫙쫙 그어진 바카라은 꺼내보겠다. 요즘처럼 볕이 따가운 날. 바카라 속 문장을 빼내어 빨랫줄에 널어 바람과 햇빛 속에서 광희 나게 지지고 볶아볼 테니깐. 기다려주시겠어요?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