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인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기
내가 쓰고 싶은 장르는 ‘소설’이다. 딱히 나를 에세이스트라고 정의해서 그 안에 갇혀 있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뜻 소설을 쓰기에는 나에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집필이다. 머릿속에서는 인물이 선명하다.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안다. 그런데 막상 글로 옮기면 인물은 자기감정을 설명하는 말만 늘어놓는다.
그나마 용기를 내서 세상에 내놓은 소설이 온라인카지노북 《달걀 한 판 로맨스》이다.
이 바카라은 서른 살이 되면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서른이 되어 보니 이제야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생이라는 계단을 함께 올라와 준 친구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조금씩 달라지는 삶을 살아간다. 온라인카지노북 소개란에는 이런 마음을 담았다.
‘가장 큰 변화를 주고 싶은데 수국 주면서 청혼해 줄래요?’
짧은 소개지만, 내가 이 소설에 담고 싶었던 마음이 들어 있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누군가에게는 안정된 어른의 나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서툴고 낯선 시작이었다. 그 안에서 사랑도 하고 싶고, 변화도 하고 싶고, 무엇보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소개 문구처럼 《달걀 한 판 로맨스》는 로맨스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쓸 때는 드라마 《서른, 아홉》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세 여자가 서로의 삶을 지켜보고, 아파하고, 기뻐하며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여자들의 진한 우정은 때로 사랑보다 더 위대해 보이기도 했다.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우정을 놓치지 않고, 서른이라는 나이를 이야기하면서 그 나이에 아직 끝나지 않은 가능성을 담고 싶었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인물의 감정과 나만의 분위기가 선명한데, 막상 글로 옮기면 인물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분명 글을 쓰고 싶은데, 이 또한 에세이와는 다른 장르의 창작이라서 그런지 쓸 만하다 싶으면 머릿속에서 브레이크를 연신 밟았다. 인물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멈추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또 멈췄다. 머릿속에서는 분명 그럴듯한 장면이었는데, 막상 문장으로 옮기면 어딘가 어색했다.
에세이를 쓸 때는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문장에 담을 수 있었다. 내가 왜 슬펐는지, 무엇 때문에 기뻤는지 설명하는 일은 그나마 익숙했다. 그런데 소설은 달랐다. 내가 만든 인물이 슬프다고 해서 무작정 슬프다고 쓰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 인물이 왜 슬픈지, 슬픔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까지 생각해야 했다.
결국 인물의 마음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어떻게 보여 줘야 하는지는 몰랐다. 어쩌면 나는 인물을 만든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감정에 사람의 이름만 붙여 놓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수록 더 어려워졌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처럼 인물이 살아 움직이고, 그들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직접 쓰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 에세이스트라는 이름 안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도 미리 정해 두고 싶지 않다. 아직은 인물들을 전기장판 위에서 일으켜 세우는 일부터 연습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나는 내 소설 속 인물들이 충분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독자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내 소설의 문체가 팔딱팔딱 뛰는 활어처럼 활기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때로는 소설을 에세이로 오해받기도 했고, 소설보다는 영화나 드라마의 시나리오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처음에는 내가 생각한 소설의 모습과 독자들이 읽어 낸 소설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과 독자들이 매력으로 느낀 부분이 꼭 같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힐링물을 쓰는 데 강점이 있고,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풀어내는 데에도 나름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사와 지문을 통해 장면을 그려 내는 방식도 어쩌면 나만의 장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이 내 글에서 영화나 드라마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 역시 내가 이야기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테니까.
이것은 구린 예술가인 나에게 꽤 특별한 발견이었다.
잘 쓰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장르에서도 내가 가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부족하다고 여긴 부분만 들여다보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장점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일 수도 있다는 것.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서툴게나마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아직 소설을 잘 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막히는 부분도 있고, 내가 상상한 장면을 문장으로 옮기지 못해 답답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제는 소설을 쓰는 일이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다.
에세이스트라는 이름에 나를 가두지 않고 싶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듯, 이제는 소설을 잘 쓰지 못한다는 생각에도 나를 가두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구린 예술가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인지, 그리고 내 글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는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