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해서 지극히 인간적인

by이곰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할 때 유난히 인맥자랑을 하던 A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와 점심을 같이 먹게 되는 날이면 여지없이 고역이 시작되었다. A는 점심시간 내내 자신이 아는 온갖 인맥을 사슬처럼 풀어냈다.


"내가 골프를 쳤는데, 어떤 사람이랑 쳤게? 나랑 골프 친 사람이 박세리 선수랑 아주 잘 아는 사이야. 그런데 그 사람이 정부기관 고위 공무원하고도 친하대."


성경 마태복음의 아득한 족보나 용비어천가를 듣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신이 몽롱해져서 내가 입에 밥을 넣는 건지, A의 입에서 쏟아지는 사람 이름을 씹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넓은 인맥에 사활을 거는 사람이 맞았다. 하지만 A의 입에서 열거된 그 대단한 사람들도 과연 A를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회사에서 승진에 밀리고 입지가 좁아지던 자신의 처지를, 화려한 인맥이라는 환상으로 돌파해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그런데 요즘, 나 역시 그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을 만날 때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진 것들을 은연중에 늘어놓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 지금 A처럼 굴고 있네. 별다르지 않구나.’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지고, 나의 가치를 증명해 주던 명함과 사원증, 회사 이메일 계정이 없어지자, 나 역시 다른 무언가로 나를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살던 전셋집의 재계약을 하던 날이었다. 60대쯤인 집주인은 부동산 중개업소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얼마 전 매수한 원룸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중개업소 사장님이 계약서를 준비하는 내내 자랑은 끝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나이가 됐으면 집 한 채는 있어야지"
"아, 네. 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준비? 어디에 어떻게 하고 있는데? 내가 이 동네는 잘 아니까 말해봐."
"아, 네....."


지극히 사적인 정보인데도 집주인은 계속해서 질문해 대기 시작했다. 연배가 있는 분의 질문이라 답을 안 하기도 뭐해서 엉겁결에 조곤조곤 대답을 해나갔다. 그런데 내 대답이 이어질수록 집주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지는 집주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내 기를 죽이고 싶었던 거구나.’


얼굴이 붉어진 집주인이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그런데 왜 전세를 살아?"
"아 네.... 제가 일하는 온라인 게임이랑 가까워서요"


어색한 침묵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집주인의 질문 릴레이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집주인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내내 조용했다. 중개업소 문을 나서며 입꼬리를 씰룩이던 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진 것으로 어린 세입자의 기를 꺾으려던 나이 든 집주인과의 기싸움에서 이긴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그 집주인의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존재감을 세우려 했던 방식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세입자 앞에서 조금은 우쭐대고 싶었던 그 얄팍한 마음이, 지금 내 안에도 똑같이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언젠가 나는 거실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라는 문구를 써 붙여놓은 적이 있다. 도덕적이어야 하고 원칙에 맞게 살아야 하는, 내가 만든 기준이 나를 옥죌 때마다 그 문장을 보며 나 스스로에게 말해주곤 했다.


‘가끔은 유치하기도 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 보며 질투도 하고, 내가 좀 잘났다 싶으면 우쭐해해도 괜찮아.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이라면 그 정도의 찌질함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니까.’


이제는 때때로 우쭐해지고, 때때로 찌질해지는 나를 발견할 때에도 무작정 나를 바카라망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고상할 수 없는 나를 인정하는 것. 이 유치하고도 솔직한 찌질함이야말로, 내가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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