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뜨거운 여름이 해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일 년 열두 달 중 절반 정도를 여름이 채우는 것 같다. 나에게 여름은 생산적인 모든 행위를 멈추게 만드는 계절이다. 일상의 루틴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 요리와 청소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배달 앱으로 끼니를 채우고, 집안일은 자꾸 미뤘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은 ‘더위’라는 핑계 아래 하나둘 어그러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을 하면서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러다 훅 찾아온 가을 문턱에서야 비로소 내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상태가 심각한 곳은 냉장고와 냉동고였다. 브랜드만 다른 똑같은 소스들, 다음에 먹으려고 놔둔 시든 야채, 싹이 나기 시작한 양파, 말라비틀어진 사과까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문득 여름날 동생이 왔을 때가 떠올랐다. 동생은 집에 오면 엄마처럼 뒷짐을 지고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그러다 화장품이 담긴 다용도 함까지 열어젖혔다. 그런데 눈이 휘둥그레며 말했다.
"누나, 화장품 좀 그만 사!"
나름 미니멀리스트라 자부하던 나에게 잔소리를 퍼붓다니, 조카가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끼고 사는 줄 알았던 누나의 실상을 본 동생의 '절약 훈계'는 여름 내내 이어졌다. 도대체 뭐가 그리 가득 차 있었길래 동생이 그랬을까. 궁금한 마음에 다용도 함을 열었다가 나 역시 말을 잃었다.
브랜드만 다른 샴푸, 로션, 스킨, 마스크팩이 한가득이었다. 더운 여름 집안에서 하루 종일 있는 날들이 많았다. TV를 켜다 홈쇼핑 채널이 나오고 '곧 매진', '최초 방송', '최대 할인' 같은 자막이 뜨면 나도 모르게 돋보기를 쓰고, 핸드폰을 들고, 결제 카드를 준비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카드 명세서를 쓰인 결제금액을 보고 놀라 확인해 보니, 무이자 할부로 산 홈쇼핑 물건이 열 건이 넘었던 적도 있었다. 정신 차려야지 하다가도 막상 TV에 쓰고 있는 제품이 보이고 판매자가 '최대 할인'을 외치면 홀린 듯 결제를 누르고 있었다.
날씨가 선선해졌으니 이제 정말 정신을 차려야겠다. 가장 먼저 '냉장고 파먹기'에 돌입했다. 자주 배달시켰던 중식 용기 속 계란국과 밥 상태를 확인해 가며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단무지는 유리 용기에 따로 담아 라면 먹을 때 곁들이기로 했다. 냉장고 한쪽을 채우고 있던 각종 카레와 난은 일주일 내내 하루에 하나씩 비워냈다.
손대기 난감했던 소스류(두반장, 굴소스, 월남쌈 소스, 크림치즈 등)도 앞으로의 아침 식사와 볶음 요리 용도로 제자리를 정해주었다. 싹이 난 양파는 못 먹는 부분만 잘라내어 제육볶음에 넣고, 샤부샤부용으로 샀다가 시들어버린 배추와 숙주는 미안한 마음으로 보내주었다. 먹을 만큼만 사자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다용도 함은 서랍 공간의 절반이 보일 때까지 추가 소비를 절대 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했다. 쓰던 게 떨어져도 사지 않고 뒤져보면, 어김없이 비슷한 대체품이 나왔다. 대체 이건 언제 산 건지… 반성하며 하나씩 써나가는 중이다.
서서히 냉장고와 다용도 함에 여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재밌는 건, 나를 둘러싼 공간에 비어있는 자리가 생기니 답답했던 마음속에도 조금씩 숨 쉴 공간이 트이는 기분이라는 점이다. 언젠가 TV에서 집에 쓰레기를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의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비정상적인 공간 뒤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와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운 여름 핑계를 대며 널부러져 있던 내 마음도 제때 비워내지 못하고 채우기만 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있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능행스님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부처님 말씀대로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으며 고정된 나라는 실체도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해놓고, 굳어진 마음의 습관을 죽음 앞에서조차 내려놓지 못해 안타깝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자꾸 자신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그저 하루를 마칠 때 '오늘 이런 마음을 품었구나', '이 말은 잘못했구나', '이 일은 도움이 되었구나' 하고 하나씩 꺼내보면 된다. 그렇게 매일 자신을 살피는 시간이 쌓여 결국 자신만의 향기가 된다."
어지러운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정돈하는 일.
그것은 내 마음속에 차오른 불안과 외로움을 하나씩 골라내어 비워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물건이 비워진 자리에 맑은 바람이 들어차듯, 공간을 정리하는 손길 끝에서 마음도 비로소 숨을 쉰다.
나를 둘러싼 일상의 자리를 살뜰히 들여다보고 가꾸는 일.
그것은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매일의 내 마음을 살피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