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르륵, 20년의 무게를 비우다
사무실 한구석, 종이 파쇄기 앞에 섰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매일같이 위클리 다이어리를 써왔다. 알록달록하게 꾸미는 취미용 다이어리가 아니라, 그날의 생존이 걸린 진짜 ‘업무의 기록’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빽빽하게 적어 내렸고, 하나를 끝낼 때마다 빨간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내 다이어리는 언제나 해야 할 일과 그것을 악착같이 지워낸 흔적들로 가득했다. 만약 퇴근 시간까지 선이 그어지지 않은 일과가 남아있으면 마음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그 지워진 선 하나가 나에게는 “오늘의 나도 무사히 살아냈다”는 눈물겨운 표식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낸 흔적이 스무 권. 해마다 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쓰레기통에 툭 던져버리기엔 너무 많은 시간과 마음이 갈아 넣어진 것 같아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동료들이 모두 점심을 먹으러 나간 고요한 정오. 나는 바카라장 깊숙이 꽂혀 있던 스무 권의 다이어리를 양팔 가득 안고 조용히 파쇄기 앞으로 걸어갔다. 한 시절의 무게만큼 묵직하게 쌓인 스무 권의 다이어리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참 많기도 하다.”
스프링을 거칠게 뜯어내고, 종이 뭉치를 한 움큼 뽑아 파쇄기 틈으로 밀어 넣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드르르륵—”
텅 빈 사무실에 파쇄기 소리가 거칠게 메아리쳤다. 스무 권의 과거를 하얀 가루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 주위를 깨끗이 정리한 뒤 알맹이가 빠져나간 텅 빈 다이어리 커버들을 쓰레기통에 가지런히 넣었다.
그리고 파쇄기 아래 잘게 잘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종이 조각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눈시울이 뜨겁게 차올랐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참아보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훌쩍임을 막을 길은 없었다. 코를 훌쩍이며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쓰레기통에 담긴 다이어리 커버를 손끝으로 살짝 매만지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너희들도…… 수고 많았다.”
명예퇴직 당일,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바카라상 위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내가 쓰던 모든 서랍을 다시 한번 열어보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커다란 박스에 사무용품을 끙끙대며 담아 나가는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정리할 게 이미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져갈 짐은 택배로 미리 보냈고, 버려야 할 과거는 이미 파쇄기로 전부 갈아 넣었으니까.
오후 두 시. 드디어 떠날 시간이었다.
함께 고생했던 후배들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여기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다들 너무 고마웠어.”
애써 환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정리되면 연락할 테니까 전화 꼭 받아라. 번호 차단하지 말고.”
그제야 굳어있던 후배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터졌다.
“선배,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또 봬요!”
“건강 챙기셔야 해요!”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았다. 엘리베이터 안의 나와 문 앞에 선 팀원들. 이 문이 닫히는 순간을 기점으로 이제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과 속도로 흘러갈 것이다. 문이 닫히며 손을 흔들던 동료들의 모습이 마침내 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 나는 두 손으로 가방 손잡이를 괜히 한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숫자가 변해가는 패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3, 12, 11…… 3, 2, 1.
딩동. 마침내 문이 열렸다.
나는 로비 한복판에 잠시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회사의 거대한 출입문 손잡이를 잡고 힘껏 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눈을 뜨기 힘든 쨍한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내 온몸 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쉰다.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