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새벽배송과 빗장공동체가 만든 수치심

닫힌 공간이 영혼에게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법

by몸글 작가 고결

1부. 추락한 곳에서 마주한 날 것의 현실세계



배송 물량이 폭주하는 화요일 오후, 배송을 하기 위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 좁은 밀실 안은 이내 무거운 정적으로 채워진다.


층마다 멈춰 서며 배송하는 소란스러움이 야속했는지, 함께 탄 중년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닫힘' 버튼을 연타하기 시작한다.


"아, 택배 때문에 또 늦네."


정적을 깨고 날카롭게 박히는 짜증 섞인 탄식. 그 곁에 선 이십 대 아들이 무안한 듯 엄마를 팔꿈치로 살짝 찌르지만, 중년여성은 들으라는 듯 바쁘다는 말을 독백처럼 되풀이해 댄다.


그 순간, 땀에 절어 초라해진 택배기사의 등 위로 수치심이 서늘하게 흘러내린다.


언제부턴가 엘리베이터는 사람의 존재를 명함의 무게나 연봉의 숫자, 혹은 주택 평수라는 건조한 숫자로 슬롯적 지위로 냉혹하게 재단시켜 주는 잔혹한 심판대가 되어버렸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지위로 인한 불안(Status Anxiety)'의 매정한 민낯을, 나는 매일 이 수직의 밀실 안에서 경험한다.


도시가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공간의 매끄러움을 따라 더욱 교묘하게 세워져 있다.


매끄러운 대리석이 깔린 신축 아파트 정원에서 만난 한 주민은 향긋한 텀블러를 든 채 땀범벅이 된 아내를 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젊은 분이 운동도 되고 참 좋겠어요.”


악의 없는 그 다정함은 사실 쌀자루보다 더 무겁고 서늘하게 다가온다.


생존을 위한 우리의 치열한 사투를 가벼운 유희나 취미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그 찰나의 시선은, 노동이 품은 본질적인 고귀함을 순식간에 소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낡은 빌라의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면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벽과 마주한다.


까치발을 들어 낡은 담장 너머로 조심스레 상품을 밀어 넣어야 했던 어느 고단한 오후, 얼마 뒤 날아온 문자는 날카로운 비명과도 같았다.


“단독주택 산다고 무시하는 겁니까? 왜 안으로 안 넣어주고 담장에 걸쳐둬요?”


그 문장은 공간의 형태가 사람의 영혼에 이미 어떤 깊은 흉터를 새겼는지를 처절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간이 지닌 그 나름의 미학과는 무관하게, 알 수 없는 비교의 늪에서 상처받으며 저마다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비교와 배척의 논리가 ‘새벽배송’의 서글픈 풍경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내와 새벽 5시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가, 밤새 마감 시간에 쫓겨 퀭한 표정으로 짐을 나르는 새벽배송 기사와 마주칠 때가 있다.


그의 초조한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소비자의 '편의성'과 노동자의 '생명'을 두고 경중을 따지는 세태 속에서, 택배기사는 정당한 대가 없이 밤과 새벽이라는 당연한 휴식의 시간마저 반납해 가며 타인의 편리함을 만들어야 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노동의 배반》에서 지적했듯, 가난할수록 삶의 추가 비용을 더 크게 부담해야 하기에, 워킹푸어인 노동자들은 경사면에서 멈춰버린 구슬처럼 부당한 이 굴레를 쉽게 떠나지도 못한다.


특권을 누리는 누군가의 편리함이 고통받는 타인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수전 손택의 성찰은, 매일 아침 차갑게 배달되는 새벽의 택배 상자 위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현대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이 삭막한 숫자의 위계가 만든 폐쇄된 경계, 즉 자기들만의 ‘빗장공동체’다.


페루 리마에 부촌과 빈민가를 가르며 세워진 ‘수치의 벽’처럼, 도시는 소유에 따라 높다란 경계의 성벽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정하고 비틀린 삶의 경계를 희석시키는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단독과 연립이 옹기종기 모인 낡은 골목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담장 너머로 고추나무가 고개를 내밀고, 첫 배송지를 지날 때마다 "사장님, 오늘은 뒷간까지 짐이 꽉 찼네. 힘들어서 어떡해"라며 소박한 안부를 건네오는 동네 분들의 정겨운 목소리.


우리 탑차를 좋아해 늘 주변을 맴돌던 꼬마아이와, 높은 나뭇가지에 걸린 신발주머니를 대차로 떨어뜨려 주었을 때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달려가던 초등학생 소년의 귀여운 뒷모습.


우리는 서로의 깊은 사정을 잘 알지 못하지만,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온기를 나누는 '친한 이방인'이다.


리처드 세넷의 통찰처럼, 비틀린 삶의 경계를 복구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웃의 안녕을 묻는 이 정중하고 <소소한 예절> 속에 있다.


그것은 타인을 배척하지 않고 온전히 바라보는 식지 않은 관심을 의미했다.


세상이 나를 숫자로 재단하고 멸시하려 할 때마다, 나는 숫자가 아닌 노동현장에서 발견한 정겨운 삶의 단어를 골라 내 일상의 표면을 밤마다 정성껏 치장한다.


중국인 택배기사 '후안 앤'이 말했듯 진정한 자유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의식할 수 있는가에 달린 '삶의 지렛목'같은 것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빗장공동체의 차가운 눈빛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고요를 방패 삼아, 오늘도 나만의 정겨운 문장들을 묵묵히 새겨 넣는 자유를 그저 그렇게 즐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