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눈먼 운명과 차가운 저울을 든 여신들

레일 위로 쏟아지는 정직한 통증의 미학

by몸글 작가 고결

1부. 추락한 곳에서 마주한 날 것의 현실세계



이른 새벽 5시, 피로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추슬러 어둠을 가르며 택배 터미널 분류장에 도착한다. 그곳은 거대한 괴물의 뱃속처럼 서슬 퍼런 기운을 내뿜으며 이미 깨어나 있었다.


마치 택배기사들의 오늘 배송을 다그치 듯, 도크에 나란히 정차한 거대한 간선 트럭들은 매캐한 매연과 함께 거친 엔진소음을 어두운 새벽공기 속으로 길게 뿜어낸다.


잠시 후 요란한 굉음과 함께 휠소터는 돌아가고, 밤새 닫힌 컨테이너 내부에 갇혀 있던 택배 상자들이 차가운 냉기와 눅눅한 종이 박스의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일시에 하역 레일 위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하면,


나는 지금껏 살아온 삶의 모든 이정표를 내려놓은 채 그저 이름 없는 택배기사가 되어 생존을 위해 펼쳐진 또 다른 가혹한 삶의 무대 위로 올라선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크고 작은 상품들이 밀물처럼 흘러가는 철제 레일 곁에서, 나는 부조리한 삶의 하중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거인 '시지프스'가 된 것 마냥, '까대기'라는 힘겨운 노동을 무한 반복한다.


20kg이 족히 넘는 쌀포대와 둔탁한 고양이 모래, 세제 박스, 감자 박스와 소금 자루까지, 현장의 거친 언어로 '똥 짐'이라 불리는 무거운 몰짐들이 사정없이 흘러온다.


이 소음과 먼지 가득한 터미널 안에서 택배 기사들은, 비로소 가혹한 신탁을 내리는 냉혹한 두 여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첫 번째가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단단히 움켜 쥔 정의의 여신'유스티치아(Justitia)'다.


본래 세상의 뒤틀린 권리관계를 바로잡아야 할 그녀의 저울은, 이곳 터미널 레일 위에서는 오로지 기사의 비루한 을의 처지와 짐짝에 매겨진 헐값의 무게만을 가혹하게 확인시켜 줄 뿐이다.


사람의 몸이 허락한 무게를 초과하는 30kg, 40kg의 바위 같은 짐을 기사의 어깨 위에 무심히 얹어놓으면서도, 그 대가로 여신이 내어주는 보상은 고작 백 원짜리 동전 몇 개, 터무니없는 푼돈이 전부다.


그 불합리한 신탁에 저항하며 짐을 되돌려 보내려 할 때면, 여신은 '클레임'이라는 이름의 서늘한 칼을 휘둘러 만 원, 이만 원의 벌금을 징벌로 내리며 일방적인 복종만을 강요한다.


그런 유스티치아의 차가운 저울 곁에는 두 눈을 가린 채 주사위를 던지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또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녀의 세계에는 자비도, 인과적인 정의도 없다.


배송하기 수월한 아파트 단지라는 달콤한 '꿀구역'을 허락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며 , 기사들을 끝없는 시험대로 몰아넣으며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낡은 빌라와 가파른 계단이 즐비한 시련의 땅, '똥구역'으로 사정없이 등을 떠밀어 버린다.


레일 위에서 미처 받아내지 못해 터져 버린 농산물 박스나 깨진 아이스박스라는 비참한 제물을 마주할 때면 , 택배기사는 허탈한 마음으로 테이프를 감는 고독한 의식에 매달려야 한다.


이 하청의 교묘한 사슬 속에서 빈곤을 오롯이 개인의 나태함과 무능으로 오독하게 만드는 능력주의의 찬가만이 난무한다.


택배기사는 그저 "속도만이 원하는 욕망을 채워준다"는 자본주의적 거대한 환상에 꼭 같이 너무나 쉽게 중독되고 만다.


하지만, 일분일초가 아쉬운 배송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려 조급함과 짜증으로 걸음을 가속하고 서두를수록 하루는 더 짧고 허무하게 사라질 뿐이다.


조바심에 눈이 멀어 분류장과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성을 지르고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우리는 결국 같은 처지의 동료들끼리 서로를 가장 치열하게 갉아먹는 슬픈 전쟁을 반복하게 된다.


배송을 마치고 비좁은 탑차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을 때면, 성취감 대신에 세상이 던진 멸시의 시선과 나의 초라함이 뒤섞인 마그마 같은 박탈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 치솟아 오른다.


"나는 한없이 가벼운 헐값의 노동자로 소모되며 살아야 하는 로봇인가"라는 뜨거운 자괴감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근원적인 기분, 즉 세상 밖으로 홀로 튕겨 나간 듯한 '고향 상실(Unheimlichkeit)'같은 지독한 소외감을 오롯하게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데거는 오직 이 지독하게 소외되고 불안함 만이 우리를 왜곡시키는 세상에서 건져내어 '본래적 자기'와 마주하게 만든다고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이 모진 불안과 상실감 뒤에 감춰진 '본래의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 걸까?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과 계산을 모두 끄고, 정직하게 짓눌리는 몸의 움직임과 근육의 저릿한 통증에만 마음을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내면의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쥐어진 박스에 적힌 동호수를 세심히 다시 한번 살핀다.


오늘 유난히 무거운 세제와 농산물 박스를 실은 핸드 카트의 손잡이를 쥔 나의 귓가로 가쁜 내 숨소리가 낯설기만 하다.


아무도 없는 불이 꺼진 엘리베이터 앞, 정적 속에서 나는 땀에 젖은 나의 육신과 숨소리를 느끼며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고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욕망이 요동치는 상상을 멈추고 육체가 물리적인 중력과 정직하게 부딪쳐 가며 흘리는 땀방울을 온전히 느끼는 순간, 서서히 나의 내면에는 맑은 진공 상태, 즉 은총처럼 주어지는 깨달음이 머물 '투명한 빈자리'가 열리고 있었다.


세상이 내 노동의 가치를 저급한 '푼돈' 노임으로 조롱하고 멸시할지라도, 내가 그 시선에 나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 차가운 조롱 섞인 가격표는 내 영혼을 단 한 뼘도 침범할 수 없으리라.


이 정직한 몸의 괴로움을 나침반 삼아, 이 세상이 지워버린 내 이름을 스스로 복구해 나가는 일.


이것은 바로 두 여신이 지배하는 부조리한 일터 한가운데서 내 삶의 존엄을 고결하고도 단단하게 지켜내는, 나만의 고요하지만 가장 격렬한 사유적 투쟁이자, '논리적 반역'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