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 단위의 허상과 푼돈의 축복이 교차하는 자리
자신만만했던 마흔 살, 영원히 견고할 것 같이 시작했던 사업을 단 3년 만에 접어야만 했다.
실패의 대가로 난생처음 겪어보는 혹독한 '돈 가뭄'과 '돈 갈증'이 공포스럽게 내 삶을 덮쳐왔다.
당장 아이들의 교육비와 다달이 숨을 조여 오는 집세에 대한 부담감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내 삶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돈의 보호막이 한순간에 사라진 채 맞이하는 새벽은 잔인하게 두려웠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각광받는 것은 억 소리 나는 '큰돈'이다.
부유한 성공만을 좇아 전화 한 통에 숟가락을 놓고 밤낮없이 달려 나갔던 열정의 결실들은, 돈의 보호막이 걷힌 차가운 현실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실업급여와 중년 재취업 지원제도의 문턱을 전전하며 현실의 높은 벽 앞에 번번이 좌절하던 막다른 길에서 , 나는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스무일곱 젊은 날, 미군부대의 물품을 조달해 주는 일로 엄청난 큰돈을 벌어 한옥 세 채와 쌀집, 심지어 마을금고까지 소유했다.
그러나 친척들의 보증 문제로 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파산했고, 맨 몸뚱이로 머나먼 부산으로 도망치듯 피신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개인택시 기사가 된 아버지는, 운전복 왼쪽 가슴팍 주머니에 다 해진 마을금고 수첩을 평생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사라져 버린 큰돈과 과거의 영광을 아쉬워하며, 평생 어긋난 현실과 사람들을 원망하셨는지도 모른다.
늘 가슴속 텅 빈자리를 남의 돈으로라도 메꾸고 위로를 받으려 하신 탓인지 우리 집은 나날이 빚이 늘어갔다.
그런 집의 장남인 나에게 돈을 벌어 그런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는 숙명적 과제가 무거운 족쇄처럼 주어졌다.
돈을 벌고 성공해서 자랑스러운 장남이고 싶다는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정작 내 곁에 있던 아내와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은 언제나 돈 뒤에 철저히 가려져 버렸다.
오십 줄에 들어서자 생겨난 노후에 대한 불안감에, 모든 인연을 정리한 채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이곳으로 흘러와 가족과 함께 택배를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가혹한 택배속도 경쟁 속에서 온몸에 통증을 달고 배송을 하던 어느 날, 택배차로 돌아오는데 빵집 카페 앞 사거리 길바닥 위에 하얗게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백 원짜리 동전이었다.
모카빵 한 개가 4,000원이고 짜장면이 9,000원인 세상에서, 이 푼돈은 이제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채, 오랫동안 길바닥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뒹굴며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버려져 있던 그 작고 보잘것없는 동전.
그것은 한순간에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내 처지와 꼭 닮아 있는 선명한 자화상이었다.
선뜻 지나치지 못한 채 땅바닥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 푼돈을 주워 올렸을 때, 장갑을 타고 전해지는 동전의 감촉과 무게가 새롭게 다가왔다.
택배상자 한 개를 배송지 문 앞에 온전히 내려놓을 때 내 손에 쥐어지는 수수료는 대략 백 원짜리 동전 몇 개가 전부다.
이 사소한 푼돈들이, 이른 새벽 다섯 시마다 눈을 떠 육체를 움직이며 흘린 나의 정직한 땀방울과 뒤섞이며 모여서,
결국에는 우리 가족의 삶을 든든하게 지탱시켜 주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백 원짜리 동전이 때로 찌든 나의 장갑 손바닥 위에서 빛난다.
세상은 늘 더 크고 화려한 것들을 소유해야만 정말 행복해진다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정작 큰돈을 움켜쥐려 안간힘을 쓸수록, 인생의 크고 작은 소중한 것들은 깡그리 놓치며 허망하게 살아온 건 아닌지,
그리고 '돈만 의지하는 삶'이라는 한없이 빠져드는 수렁 속에서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불안을 껴안으며 살아 온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 세상이 멸시하는 백 원짜리 '푼돈'을 통해 소소한 삶의 축복들을 다시금 바라보고 계산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큰돈 보다, 삶의 매 순간들을 목돈처럼 귀하게 여기는 일상을 향한 내면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우리 본연의 감정과 품위가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성곽이 되는 일상의 혁명은 그렇게 조용하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