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보다 '이유'를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
일을 부탁한다는 건 부탁드릴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해 가는 과정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예전 경험으로 배웠는데요. 혹시 예전의 저처럼 생각하고 계실 분들이 있을까 싶어, 그날의 기록을 꺼내어서 공유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누군가에게 요청을 드릴 때는 맥락, 즉 '왜'가 먼저 나와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미팅이 오해 없이 진행되고, 참석자들도 제 의도를 깊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전 온라인 게임에서의 일입니다. 온라인 게임인 대상의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회사였고, 저는 한 과정을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정에는 수강생들의 방향을 잡아 주는 코치 두 분이 계셨는데, 다음 기수부터 기존보다 역할을 조금 더 맡아 주십사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 화상 회의를 잡았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회사를 옮겨 B2B 병원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1.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준비한 계획표를 화면에 띄웠습니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수강생들이 수행할 태스크를 칸별로 나눠 둔 표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날마다 한 줄씩만 적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다 채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쁘신 분들이니 일을 최대한 덜어 드리는 게 제 딴에는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표는 날마다 주제와 방법이 빼곡히 적혀 있어, 누가 봐도 제가 아닌 ‘그분들이 해야 할 수업 계획표’처럼 보였습니다. 두 분은 제 설명보다 화면 속 빼곡한 칸들을 먼저 보셨고, 이내 방어적인 어조로 물으셨습니다. "그럼 저희가 이 수업을 통째로 다 하라는 건가요?"
저 스스로는 완벽하게 준비해 갔다고 믿었던 자료가 예상치 못한 오해를 사자 저는 크게 당황했던 것 같아요. 왜 이 표를 채워 왔는지부터 설명해야 했는데, 당장 눈앞의 오해를 수습하는 데 급급해져 제 대답은 그 자리에서 네 번이나 바뀌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생각의 중심이 빈약하니, 질문 하나에 제 논리가 사정없이 뒤집히며 상대에게 갈팡질팡 끌려다녔던 것 같습니다.
2.
여기에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표는 제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니었거든요. 다른 강사분이 하신 말씀을 그냥 받아 적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받아 적은 내용을 그대로 들고 갔던 겁니다. 제 말에 힘이 없었던 진짜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이전 화에서 제가 계속 말했던 실수를 정작 저 스스로가 하고 있었던 거죠.
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실제 미팅이나 현장에서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고, 결국 내 자료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 놓고 말입니다.
결국 중간에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분이 편한 방식으로 역할을 드리고 싶다고요.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니까 대화는 금방 풀렸습니다. 이론은 회사에 이미 있는 영상으로 수강생들이 미리 보게 하고, 두 분은 예전처럼 팀을 돌면서 봐 주시는 걸로 정리됐습니다.
3.
회의가 끝나갈 무렵에야 저는 왜 두 분께 연락했는지를 말했습니다. 예전에 저도 그 과정에 있었고, 두 분이 수강생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시는지 옆에서 다 보았거든요. 제가 담당자가 되면 꼭 두 분과 하고 싶었다는 제 진짜 마음이었습니다. 나중에 회의록을 열어보니 이 이야기를 꺼낸 게 거의 끝날 무렵이더라고요. 이 말을 맨 앞에서 먼저 꺼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두 분은 그 빼곡한 표를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그냥 이런 흐름을 생각해 봤으니 편한 방식으로 바꿔 달라는 예시 정도로 보셨을 겁니다. 적어도 제 대답이 네 번씩 뒤집히는 일도 없었을 테고요.
4.
돌이켜보면 저는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면 자꾸 자료 준비에 집착하고 어떤 자료를 넘길지부터 생각 하게 되더라고요. 자료를 두껍게 만들어서 넘기면, 상대가 알아서 제 의도를 읽어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말보다 자료를 먼저 보게 되더라고요. 자료가 수업 계획표처럼 생겼으면 수업을 부탁받은 줄 아시는 게 당연합니다. 결국 문제는 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제가 먼저 드렸어야 했던 건 왜 두 분과 하고 싶은지, 그 한마디였습니다.
명분이 빠진 자료는 상대에게 그냥 귀찮은 일거리로 보이기 쉽더라고요. 지금도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면 자료부터 챙기다가 저 스스로를 바로잡고는 합니다. 제 논리가 빈약하니 자료 뒤로 숨으려는 버릇이죠. 그럴 때마다 미팅 준비할 때 이 미팅으로 제가 뭘 얻고 싶은지를 먼저 적어 보려고 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