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원래 하고 싶던 일을 제가 마침 들고 간 거였습니다
저는 부탁을 잘하려면 조건을 잘 정리해 가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전의 경험으로 알게 됐는데요. 혹시 예전의 저처럼 생각하고 계실 분들이 있을까 싶어 그날의 기록을 꺼내어 공유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탁은 나와 핏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제가 원하는 게 상대방도 원래 원하는 것이었다면, 협상이 쉽게 풀리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상대방이 뭘 원할지 늘 생각해 보는 습관이 제일 중요하겠네요. 이 눈이 길러진다면, 제가 컨택할 대상도 더 잘 고를 수 있을 테니까요.
1.
전 온라인 게임은 온라인 게임인 대상의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창업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한 과정을 맡고 있었고, 그 과정에 강사로 모시고 싶은 투자사 대표님이 계셔서 화상으로 처음 인사를 드렸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회사를 옮겨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부탁은 다행히 잘됐습니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고 돌아보니, 잘된 이유가 제 쪽에 있었던 건 아니더라고요. 그분이 원래 하고 싶어 하던 일을 제가 마침 들고 갔던 거였습니다.
당시 제가 맡은 과정에는 대기업을 오래 다니다 나온 분부터 현직 교수님까지 다양한 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다들 창업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찾아온 분들이었고, 이분들 앞에 세울 좋은 강사를 모셔 오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링크드인 프로필로만 보던 대표님과 화면으로 마주 앉았는데, 제 첫마디부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제 자기소개가 길어졌습니다. 대학 시절 얘기부터 예전에 작게 사업을 하다 접은 이야기까지 혼자 다 꺼냈으니까요. 제 사정만 늘어놓은, 부족한 첫인사였던 것 같습니다. 저 혼자 계속 말하다 보니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고요.
그나마 잘한 게 하나 있었다면 강의 주제를 제가 마음대로 정해 드리지 않은 겁니다. 대표님이 강의를 하신다면 이건 진짜 잘할 수 있겠다 싶은 주제가 무엇인지 여쭤봤거든요. 돌아온 답이 재미있었습니다. 한 줄로 눈길을 끌어 본다면 "투자 받지 마세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투자하시는 분이 고른 주제가 투자를 받지 말라는 이야기였던 거죠. 처음 창업하는 분들은 투자가 대체 뭔지, 꼭 받아야 하는지부터 헷갈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투자하는 쪽이 뭘 보고 왜 그런 걸 요구하는지 솔직하게 설명해 주고 싶다고요. 저희 과정과 딱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과정의 취지를 말씀드리고, 마지막 날 수강생들이 만든 서비스를 발표하는 자리에도 와 주실 수 있냐고 부탁드렸습니다. 꼭 투자를 하시라는 게 아니라 좋은 팀을 보러 와 주시면 좋겠다는 뜻이었고요. 대표님은 숨은 진주 같은 팀을 한 팀이라도 발굴할 수 있으면 본인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라며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부탁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참에, 대표님이 미팅 중에 제가 슬쩍 언급했던 어느 창업팀을 다시 물어보셨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 서비스인지, 회사 이름이 뭔지까지요. 그러더니 시간 괜찮으면 조금만 더 이야기해도 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이번엔 대표님 쪽에 들려주고 싶은 게 있으셨던 겁니다.
알고 보니 제가 강사 미팅을 하면서 예시로 든 그 회사는, 대표님이 원래 투자하고 싶어 하던 곳이었습니다. 만나기까지 했는데 회사 몸값이 너무 높아서 계약을 못 하셨다고요. 마침 제가 그 회사 분들을 알고 있어서 먼저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고, 대표님은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부탁한 건 저였는데, 고맙다는 말은 오히려 대표님이 더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리서치를 충분히 했다면 이 대표님이 누구를 컨택했는지 미리 알 수 있었을 거고, 아니면 미팅 중간에 질문으로라도 캐치할 수 있었을 거라는 겁니다. 이번에는 운 좋게 얻어걸리긴 했지만요.
2.
비슷한 일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작은 사업을 할 때, 요리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많은 요리사를 배출하고 있는 저희 학교의 호텔조리학과 교수님을 약속도 없이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요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보다 "졸업 전에 자기 요리를 손님에게 직접 팔아 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교수님의 평소 고민을 먼저 건드렸더니, 교수님이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보내 주셨거든요. 돌아보면 그날 제가 한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대표님이 원래 하고 싶어 하던 걸 먼저 듣고, 제 부탁을 그 마음에 슬쩍 얹은 게 다였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에게 부탁을 드리기 전에 한 줄을 먼저 적어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이 일을 도와주면 뭐가 좋을까. 요즘 원하는 게 무엇일까.'
적을 게 없으면 그 사람이 요즘 뭘 하고 싶어 하는지부터 여쭤보는 게 먼저더라고요.
이렇게 적어 놓고도 질문을 던진 게 아니라 제 얘기만 하려고 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많이 다듬는 중입니다. 부족한 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