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좋아하는 비지찌개.
콩껍질 벗기며 쓴 편지

엄마의 유산

by지담

방금, 어제 불린 하얀 콩을 하나하나 조물락거리며 껍질을 벗겼어.

'뭐 먹고 싶어?'하면

'엄마가 해주는 비지찌개'

엄마가 해준 것 중에 네가 유독 좋아하는 음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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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손을 담그고 엄지와 검지로 껍질을 하나씩 벗기는 게

조금 번거롭고 귀찮아도 엄마는

콩껍질을 벗기는 게 아니라

시간을 새기고 있다고 여겨.


네가 기다 앉다 할 때쯤

엄마는 벽을 만들고 네 주변에 콩을 막 뿌려줬어.

그러면 너는 가만히 앉아서

그걸 만지작대고

두 눈동자가 가운데 모이도록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어렵게 하나를 잡았다 놓쳤다 하면서

한참을 집중해서 놀았어.

입에 넣지만 않게 엄마는 지켜보고 있었지.


그러다가 조금 커서는

불려놓은 콩껍질을 벗기는 것은 항상 네 몫이었어.

넌 손끝에서 미끈거리며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두 팔을 번쩍 들고는 까르르~~ 웃으며 신나게 놀았거든.


초등학교 저학년때쯤엔 엄마가 부탁하면 해주다가

고학년이상이 되면서는 안해줬어.

그때부터 너의 '비지찌개'를 위한 콩껍질벗기기는 엄마의 몫이 되었지. 잉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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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불린 콩을 조물락거리면 껍질이 위에 동동

아이야.

네게 비지째개는 음식이지만

엄마에겐 시간이란다.


엄마 손에 콩이 닿는 순간,

기어다니던 너도 오고

콩껍질을 벗기며 까르르 웃던 너도 오고

비지찌개 한 그릇을 맛나게 비우던 너도 함께 와.


엄마는 비지찌개를 끓이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살았던 시간을

다시 끓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우리는 기억으로 사는지도 몰라.

나를 지배하며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 같은 기억도 있지만

특별할 것이 없는데도 그것만 보면 행복에 잠기는

그런 기억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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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 끓는 비지찌개,

그래서 말이야.

엄마에게 하루는 모두 기념일이야.

기억을 소환하면 모든 것이 기념이 돼.


하루는 기억에 저장돼.

저장된 기억으로 우리는 살아.


어떤 순간, 특별하게 나를 휘감는,

꼭 기록하여 기념으로 남기고 싶은 그런 하루, 있지 않니?

오늘을 기념할만한 하루로 만드는 것.

그 하루하루가

다가올 모든 생을 강하게 지배하지.


그래서인지 엄마는 요즘

매일 집앞 나무에서 떨어지는 오디를 나무젓가락으로 주우며

네가 먹을 콩껍질을 벗기며

마당의 돌을 하나둘씩 조금씩 옮겨 길을 만들며

소소한 기록들을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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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오디를 주워서 매일 아침으로.


인생이 거대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 같지만

아니야.

실제 우리를 지배하는 건

아주 작은, 소소한 행위들이란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삶을 견디는 힘도.

대부분 아주 작은 것들이 쌓여서 만들어졌더라.


오디 하나에 네가 평생 기억할 엄마를 새기고

콩껍질 하나에 지난 기억들을 행복으로 잇고

돌 하나를 옮기며 나중에 너희들 닮은 아가들이 뛰어놀 공간을 그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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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돌들을 하나씩 한 곳으로 모아 돌길을 만들었다.


만들어진 기억으로 살고

만들 기억을 위해 살고.


너무 작아서 지나치기 쉽고

너무 흔해서 기억나지 않을 것 같은 것들.

그런데 엄마가 살아보니

이 작은 것들이

엄마를 만들고 있었어.


오디 하나도 함부로 지나치지 못하고

콩껍질 하나도 대충 벗기지 못하는 엄마가

때론 답답하고 지루하고 하찮게 느껴질 지 모르지만


너희가 살다가

어떤 날은 비지찌개가 떠오르고

어떤 날은 엄마가 네 입에 넣어준 오디가,

또 어떤 날은 돌길 위를 걸으며

너희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만들게 될거야.


아직 엄마도 잘 모르겠지만

시간은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 같아.

콩껍질 하나, 오디 하나, 돌 하나에

엄마는 '오늘'을 너희 기억에 새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엄마는

하루를 쉽게 살 수가 없어.

엄마의 오늘,

엄마의 소소한 행위 하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평생 지니고 살 기억으로 새겨질 테니까.

- 2026. 06. 1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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