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 주인공이라고 상상하며 살자

허리디스크 수영인의 셀프 독서 처방

by맛있는 하루

삐걱.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추석(秋夕). 달이 유난히 밝다는 명절 연휴 첫날, 허리를 삐끗했다. 역시나, 또.


올해 추석은 단출했다. 코로나에 걸린 시동생네 가족이 발열과 오한으로 불참하면서 시부모님과 우리 가족만 모이게 되었다. 명절 음식은 차례상에 올릴 전부터 시작이다. 룸메이트가 아니라 '전메이트'는 원래 셋. 나와 남편, 그리고 동서다. 큼직한 프라이팬 앞에서 나는 전을 올리고, 동서는 익은 전을 뒤집고, 남편은 어머님이 준비해두신 반죽을 동그랗게 빚는다. 동그랑땡 제조 전문이다. 그 사이 어머님은 나물과 탕국을 맡으시고, 아버님은 집안팎의 잔일을 도맡으신다.


그런데 동서가 빠지니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전을 뒤집고, 어머님과 남편이 반죽을 빚어 프라이팬에 올리기로 했다. 전은 다 익을 무렵 뒤집으며 모양을 잡아야 하는 법.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이번 추석은 내 똥손이 차례상 위에서 만천하에 공개되겠구나 싶었다. 한숨을 쉬며 전기 프라이팬 전원을 돌렸다.


삐걱.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것도 전원 스위치를 돌리다가 삐끗이라니. 온몸이 물에 젖은 휴지 조각처럼 너덜너덜한 걸까. 동그랑땡 한 알 올리지 않고 삐끗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양심 없는 허리다.


일손이 모자라니 꾹 참아보자며 자세를 바꿔 앉았다.


"악!"


비명이 절로 터졌다. 화장실에 가는 척 어머님 방으로 들어가 서랍장을 여기저기 열어 파스를 찾아 붙이고, 짬을 내 스트레칭도 했다. 소용없었다. 놀란 근육은 뭉침으로 등판에 악의 세력을 넓혀갔고 식은땀이 흘렀다. 절뚝이며 일하시는 어머님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밤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고등학생 둘째가 중간고사를 코앞에 두고 명절 당일에 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한 덕분이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근육이완제와 진통제를 먹고도 잠이 오지 않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추석 당일 이른 아침, 아이와 시댁으로 향했다. 전날과 달리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나를 보고 어머님이 물으셨다.


"아니, 어제 허리를 많이 삐끗했구나!"


걱정거리 가득 드리고 어찌어찌 명절이 지나갔다.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운동이라는 것을 죽자고 했건만. 수영 3년 차, 휴관일만 빼고 매일 '오수완'을 채운 지 2년 차. 강습도 아닌 자유수영을 이렇게 열심히 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척추기립근이 하나도 없던 몸이 속근육이 만져질 만큼 달라졌는데 왜 이럴까. 날씨가 조금 흐려도, 잠을 조금 설쳐도, 아니 숨만 잘못 쉬어도 삐끗이라니.


허리가 골골대면 마음 날씨도 흐려진다. 예보에도 없던 먹구름이 명치께에 낮게 깔리더니 마음이 지하 1층, 2층으로 내려앉는다. 이럴 때 끌어올려주는 최고의 인양 장비가 바카라이다. 서서도, 누워서도 읽을 수 있으니까. 바카라 속에서는 데구루루 굴러 발차기로 범인을 잡기도, 순간이동 초능력을 부리기도, 백만장자가 되어 플렉스를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한 바카라 속 세상에서는 나도 팔팔한 주인공이된다.


추석 다음 날, 공휴일 진료 병원을 찾았다. 정형외과에서는 약 처방을, 한의원에서는 추나와 침 치료를 받았다. 물욕을 채운 건 아니지만 병원에서 플렉스한 김에 셀프로 독서 처방까지 내렸다.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의 신작 <절대 쫄지마>로 연쇄살인범과 맞서 싸우고, 이무기와 인간의 사랑 이야기 <계화의 여름>에도 푹 빠졌다. 죽이고 살리고,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전부 찜질팩 위에서 누렸다.



그러다 <브로콜리 펀치>에서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하는 상상력을 맛보인 이유리 작가님이 떠올랐다. 내 허리에는 어떤 환상을 더해볼까 궁리하며 작가의 단편집 <비눗방울 퐁>을 펼쳤다. 수록된 여덟 편 중 <보험과 야구르트>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매일매일을 미국 인기 시트콤의 주인공이라고 상상하며 살아라. 실수를 했다면, 어딘가에서 날 찍고 있는 가상의 카메라를 향해 입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 그걸로 끝이다. 한 화가 끝나면 모든 것이 리셋되고 다음화가 시작되듯이 엉망진창인 오늘도 끝나면 내일이 된다." _p.201, 이유리, <비눗방울 퐁>



좋아, 그렇다면 이번 추석 연휴 시트콤의 장르는 블랙코미디로 정했다. 삐끗해서 뭉친 근육은 날개뼈 사이에 태백산맥으로 솟았다. 연휴가 끝나면 불도저를 불러 난개발하듯 뭉침산맥을 밀어버려야지.




연휴가 끝나가는 침대 위로 물살이 떠오른다. 나흘을 쉰 수영장 물맛은 얼마나 개운할까. 숲속 계곡에 담가둔 수박처럼 시원달달할까. 연휴 동안 수영장을 그리워한 고인물 회원들로 피서철 해변처럼 북적이지는 않을까. 찰랑찰랑, 귓가에 물소리가 들린다. 지하로 빨려 들어가는 듯 회색빛이던 표정은 어느새 어디로 갔을까.


이렇게 또 한 번, 허리디스크가 몰고 온 우울을 바카라과 수영으로 다스린다. 첫날은 욕심 없이 발차기부터 천천히. 이번 화의 '삐걱' 에피소드는 연휴 회차의 특별 이벤트로만 남겨놓기로 한다. 내일 물속에서는 부디 '풍덩' 소리가 들리기를.


엉망진창인 오늘도 끝나면 내일이 된다. 다음 화의 무대는 수영장이다.




[헤엄치듯 읽는 법]

허리가 삐끗하면 마음도 함께 삐걱거리지만, 바카라 속에서는 누구나 팔팔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엉망진창인 연휴도 한 화가 끝나면 리셋되니, 오늘의 통증은 다음 화를 위한 복선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삐걱 소리가 멎은 자리에 풍덩,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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