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들여다본 간이 시간표

by그냥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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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만 쉬어도 진이 빠질 정도로 끈적이는 더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날이 이어진다. 핸드폰 액정의 날씨 어플에서는 37도라는 어색한 숫자가 떠 있었다. 방학을 기념하여 시골에 일주일간 내려와 있는 시간. 사방이 확 트여 있는 곳. 하지만 이곳조차 시원한 바람 한 줄기의 배려 따위는 없었다. 어른들은 뜨거운 태양열의 공격을 피해 밭 일을 멈추고 집 안에서 일상을 이어갔으나 우리 집 꼬맹이들은 어림없었다. 폭염을 조심하라고 연신 휴대폰을 울려대는 안전 문자의 잔소리. 그들에게는 그저 하찮은 저세상 메시지일 뿐이었다. 마당에 박힌 수도꼭지에 연결된 기다란 호스와 바가지 하나뿐이었지만 고삐 풀린 망아지들에게는 이미 새로운 무기가 되어 있었다. 시골 특성상 집도 드문드문, 사람도 드문드문하다. 러닝셔츠와 빤스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보는 사람 하나 없으니 마냥 해맑다.


보호자라는 무의미한 역할을 하던 나는 현관에서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글거리는 정수리의 열감을 가라앉히고자 주방으로 와서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들이켰다. 고소한 냉수의 찬기가 목구멍을 지나 몸속 장기를 한 바퀴 이동하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물병을 다시 냉장고 안에 넣고 문을 닫으니 그 위에 붙어있던 두 장의 종이가 순간 바람에 펄럭였다. 덩달아 그 안에 들어있던 익숙한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춤을 췄다.


시골에 도착한 첫날.

더위 탓인지, 멀미 탓인지 몸이 좋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약을 먹고 방에서 뻗어버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자 아이들이 소란스레 달려왔다. 두 아이의 작은 손에는 제각기 동그란 모양의 생활계획표가 들려 있었다. 분명 고단한 딸내미 조금이나마 편히 쉬라고 할머니께서 아이들과 놀아주시면서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짧은 여름방학이었다. 그럼에도 일주일이나 이곳에 있으니 내가 교육 공백에 대하여 신경 쓰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계셨을 테다. 머무는 기간 동안 조금이나마 체계적으로 지내길 바라셨을 테다. 그간 내가 대놓고 티를 낸 적은 없었으나 역시 딸 생각 해주는 건 우리 엄마가 최고다.


상념에 벗어나 다시 한번 눈앞에 나란히 붙어있는 꼬맹이들의 시간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애초의 이것을 만들자고 한 주최자의 취지와는 사뭇 다른 아이들의 목표들. 나로서는 당최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했으나 적어도 아이들의 마음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시계처럼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기준은 하루 24시간이라는 불변의 법칙이 들어있었다. 어릴 적 방학을 앞두고 으레 작성했었던 나의 그것과 모양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작품은 나의 과거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하루가 영원한 자원이라 여겼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듯 과거의 나는 그렇게 만들곤 하였다. 하지도 못할 학습 내용들을 꾸역꾸역 채워 넣었던 미련한 나였다. 새벽 6시에 기상하여 밤 10시까지 고시공부 하듯 짜인 일과는 당연히 단 하루도 지켜지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계획표는 나에게 신뢰성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붙어있는 아이들의 계획은 상당히 신뢰도가 높아 보였다.


첫째 : 운동, 아침밥, 수학 공부, 휴식, 점심, 휴식, 저녁, 운동, 영어, 휴식 취침

둘째 : 아침밥 먹기, 강아지 만나러 가기, 흔들 그네 타기, 점심 먹기, 티브이 보기, 점심 먹기, 저녁 먹기, 취침


큰 아이는 넓은 마음씨답게 몸 또한 점점 푸근해지고 있었고, 둘째는 좀체 불지 않는 몸무게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래서인지 각자 한 놈은 운동이 들어가 있고, 다른 한 놈은 점심을 두 번 먹는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도 엄마가 걱정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틈틈이 선심 써 주듯 끼워 넣었다. 24시간 중 대부분이 휴식과 놀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엄마를 위한 일정을 티끌만큼이지만 추가해 준 아이들. 다소 어이없는 논리이지만 고맙다고 해야 하겠지.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전혀 강압적이지 않고, 부담 없는 생활 계획표였다. 덕분의 이들의 하루 일과는 매일이 성공률 100%를 달성하고 있었다.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들의 생활 계획표는 나와는 달리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 간의 휴가. 매 순간 불안을 생성 중인 나 스스로를 억제시킬 방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비록 이곳에서의 일주일 짜리 시간표였으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 있었다. 하지만 인생을 순수함만 갖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물론 일찌감치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견하여 한 길을 파는 사람도 존재한다. 안타까운 점은 아직까지는 우리 집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고리타분한 상식으로서는 자신의 재능을 찾을 때까지 학습 부분에서 보통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첫째. 아이들의 도전 욕구와 지적 호기심 장착시키기.


여러 글과 영상을 볼 때면 주로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향에 대한 차이에 대한 것들이다. 남자아이들은 스스로 꽂혀야 도전하고 여자 아이들은 소셜 관계가 좋아야 마음이 간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쉽게 말하면 방향이 안으로 향하는지 바깥으로 향하는지에 대한 차이라는 것인데... 언제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는 함정이 있을 뿐이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음에도 성격부터 완전히 다른 두 아이에게 적용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점을 외면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내향적으로 보이는 아들과 외향적인 딸이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난감하게 보인다. 게다가 이미 '논다'는 신념으로 무장을 한 상대에게 공부라는 도전 과제물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 또한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누가 보아도 변명이고 핑계였다. 그러니 멀티가 어려운 나일지라도 일단 들이대야 한다는 결론으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이론은 기본으로 깔고 그 위에 아이들의 스타일에 맞게 적용해야만 할 부분이었다.


둘째. 어떤 방법으로 학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앞서 말했듯 두 아이의 성격, 성별, 성향, 그리고 나이까지 모두 다르다. 그런 가운데 생활 계획표만 보더라도 절대 공부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하고 있는 이에게 어떻게 접근해야만 하는가는 동기유발 못지않은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무엇보다 교육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어떤 길이 올바른 방법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깜깜하게 여겨졌다. 무작위로 좋다는 것을 전부 대입하기에는 나도 아이들도 받아들일 그릇이 못 됨을 인정한다. 필요한 양도 해야 할 양도 방대하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으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컴퓨터의 '이전', '재부팅'의 버튼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았으니까 말이다. 동물 실험도, 인체 실험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막막할 뿐이다.


'새로운 일을 해야 할 때는 다소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겁내지 말라. 그 두려움은 지식의 부족에서 생기는 것일 뿐이다. 모르면 배우면 된다' - 세이노의 가르침 中


요즘 읽고 있는 바카라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동안 가정 주부라는 역할만 해왔던 나에게 육아가 아닌 '교육자'라는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일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는 것과 같은 길일테다. 그렇기에 나의 갈팡질팡 하는 모습은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 무서움은 나도 모르는 새 아이를 망칠 것이라는 막연함에서 나오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나 스스로 이 불안감이 조용해질 때까지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일침이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모두가 시작을 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만큼 출발하는 것 자체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무섭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 때문에 멈추거나 뒷걸음질 치고 싶지는 않다. 물놀이 후 홀딱 젖은 상대의 모습이 웃기다는 별 것 아닌 이유로 숨 넘어가게 웃고 있는 꼬맹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다. 그러니 정답은 하나다. 백만 가지 안 되는 목록이 있다 할지라도 일단 들이대며 수정하는 것. 동기유발이건 자극이건, 학습 방법이건 우선은 출발선에 있으니 레이스에 참가부터 해야겠다. 되돌아가거나 멈추고 싶지 않다. 그러니 속도는 더디더라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가보아야겠다. 나도 아이와 함께 공부하고 배우는 길을 선택해 본다. 그러다 보면 어떤 날에는 토끼를 이긴 거북이처럼 좋은 날을 만나는 날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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