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E : 희망이란 무엇인가

프롤로그: 왜 지금 다시 희망을 말하는가

by마광훈

충북 청주시 낭성면. 도심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곳의 밤은 깊고 고요하다. 처음 귀촌을 결정했을 때,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무엇을 찾아 떠나느냐고. 그때 나는 대답 대신 아내의 야윈 손을 잡았고, 세 아이의 해맑은 눈동자를 보았다. 아내의 마음속에 내린 짙은 안개, 우울증이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는 삶의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나는 본래 명확한 인과관계와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신뢰하던 사람이었다. 효율적인 것이 선(善)이었고, 증명되지 않는 것은 불확실한 오류에 불과했다. 하지만 삶은 논리적인 공식처럼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정답을 써넣어도 삶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오답을 내놓았고, 가득 채웠다 생각한 순간 허무라는 구멍으로 모든 공든 탑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귀촌 1년 차. 낭성의 혹독한 겨울은 내게 물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금, 너는 무엇을 믿겠느냐고. 영하 10도의 새벽, 꽁꽁 얼어붙은 닭장의 물그릇을 앞에 두고 나는 망치를 들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얼어붙을 얼음이지만, 오늘 당장 목이 타는 생명들을 위해 차가운 파편을 걷어내는 그 투박한 반복. 그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가 사실은 멈춰 있던 우리 가족의 하루를 맥박 치게 하는 유일한 동력임을 깨달았다.


어느 날 저녁, 마당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딸아이가 내게 물었다. "아빠, 희망은 어디 있어? 눈에 보여?"

그 질문은 어떤 복잡한 이론보다 묵직했다. 아이는 보이지 않는 기적을 믿고 싶어 했고, 나는 아이에게 '막연한 낙관'이 아닌 '손바닥의 굳은살' 같은 실재하는 희망을 알려주고 싶었다. 특히 실종된 반려견 둥이를 찾아 헤매던 150일의 밤은, 우리에게 희망이란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차량의 불빛을 비추는 '의지'임을 뼈아프게 가르쳐주었다.


나와 가족을 위해 휘두르던 망치는 이제 조금 더 넓은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낭성의 이웃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 '단비학교'라는 대안학교가 바로 그 지점이다. 누군가는 묻는다.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는 이 시기에 왜 굳이 학교를 짓느냐고. 하지만 나는 낭성의 흙 위에서 다시 배웠다. 땅이 척박할수록 씨앗은 더 깊이 박혀야 하고, 세상이 차가울수록 아이들을 품을 울타리는 더 단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준비하는 이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곳이 아니다. 아이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나다움'을 꽃피우고, 삶의 파도가 덮쳐올 때 스스로 망치를 들어 얼음을 깰 수 있는 근육을 길러주는 터전이다. 봄눈 카페에서 정성껏 내린 커피 한 잔의 수익금이 학교의 벽돌 한 장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희망이 어떻게 연대로 확장되는지를 목격한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신기루일지 모르나, 함께 꾸는 꿈은 낭성의 아침 안개를 뚫고 솟아오르는 실재하는 풍경이 된다.


세상은 다시 우리에게 희망이 유효하냐고 묻는다. 상실이 일상이 되고, 각자도생이 미덕이 된 시대에 희망이라는 단어는 때로 사치스럽거나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나 내가 낭성의 흙바닥에서 건져 올린 희망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얼어붙은 물통을 비우고, 아이들이 뛰어놀 학교의 기둥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모으듯, 절망의 조각들을 묵묵히 걷어내는 구체적인 '노동'이었다.


이 바카라은 그 질문과 대답의 기록이다. 도시의 경쟁 속에서 마모되었던 나의 이성이 시골의 정적인 삶과 충돌하며 빚어낸 성찰이자,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인문학 수업이다. 우리는 이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얼어붙은 물그릇을 깨뜨리듯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연을 들고 뛰어야 하듯,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이 작은 기록들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망치를 들 용기가, 또 누군가에게는 잊고 있었던 '바람'의 흔적을 찾아낼 눈이 되기를 소망한다.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