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에도 나는 가족들에게 방문 대신 안부 전화를 했다.
평소에는 전화 한 통도 잘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가 이마저도 안 할까 봐, 간만에 전화를 걸자 내 심기를 살펴가며 조심조심 말을 건넨다. 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리고 나는 늘 그렇듯 별다를 것 없이 보내기 위해 명절마다 정신을 추스르곤 한다.
엄마와 통화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아빠가 할 말이 있다며 수화기 너머로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아빠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더 늙기 전에 입양절차를 밟자고. 정확히 말하면 성인입양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가 재혼하면서 나는 지금의 아빠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성을 따르지 않고, 생부의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함께 가족으로 살아왔지만, 여태껏 서류상에는 동거인으로 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 나에게는, 서류상에 동거인으로 되어 있는 게 학교 출석부에 어느 날 갑자기 성을 김 씨로 바꾸는 것보다 견딜 만한 일이었다. 일부러 감추지는 않았지만 누가 묻지 않는 이상 굳이 꺼내지 않는 개인사였다.
그리고 성인이 된 뒤로는 내가 본가를 떠나 살았기 때문에, 가족관계증명서에 누가 어떻게 적혀 있는지는 더 이상 내 일상과 상관이 없었다. 함께 살 때는 집에서 마주치는 정도의 가족이었고 떨어져 살고 나서는 가끔 안부를 묻는 가족으로 지냈다. 서류가 우리 사이를 설명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슬하에 자식이 없는 새아버지는 호적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늘 아쉬워하곤 했다. 나와 엄마는 안 해도 되는 숙제 미루듯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이번 제안이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품어온 아쉬움을 이제 와서 마무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법적절차가 필요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아직 건강하시다. 다만 새아버지가 엄마보다 다섯 살이 적으시고, 혹시 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법적인 관계를 정리해 두자는 것이었다. 아버지 사후에 본인 소유 땅이 나에게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입양 절차를 거쳐 가족관계를 법적으로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는 고향인 협재 해수욕장 근처 당신 소유의 땅을 무척 아끼셨다. 본가에 갈 때면 도로변에 있는 그 땅을 일부러 지나는 드라이브를 하는 것이 마치 유럽 관광 명소 투어 같은 나의 본가 방문 코스였다. 매번 앞으로 그 땅을 어떻게 쓸지를 같이 논의하면서 말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본가에 가지 않으면서 그 투어를 못 한 지도 몇 년이 됐다.
그리고 이렇게 명절을 맞아 나오게 된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살아온 가족이라는 관계를, 서류 위에서도 가족으로 만들어두는 일이 되었다.
30여 년 전 아빠가 어렵게 본인을 아빠라고 불러줄 수 있냐고 물어봤을 때
내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바로 아빠라고 불렀듯이,
나는 이번에도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러자고 했다.
필요한 서류를 준비되는 대로 보내겠다고 덧붙이며.
그래서 나는 마흔이 다 되어 아빠에게 입양될 예정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빠였던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