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강사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

수포자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

byLayla Lee

나는 전형적인 문과생이었다.

수학은 공통수학쯤부터 멀어지기 시작했고,

과학은 이미 고입 연합고사 때 감도 못 잡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영어나 국어 과목을 아주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영어가 재미있어서 외국어 영역을 풀었던 것도 아니고,

국어를 좋아해서 언어 영역 점수가 잘 나왔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수리나 과탐에 비해 덜 괴로웠을 뿐이다.

(이상하게 아직도 가끔 과학 과목 공부가 전혀 안된 채로 시험 보는 악몽을 꾼다.)


고3 당시 수시 전형을 알아보다가 그 해에 서강대학교 철학과가 논술 비중을 크게 높여 1차 합격자를 뽑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꽂히는 것이 생기면 일정 기간동안 그것만 깊고 집요하게 생각하고 궁리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과정이 마무리되면

다 읽은 바카라 덮듯 생각은 멈추고 바로 행동파 모드가 된다.


그렇게 나름의 탐색 후 방향을 잡은 뒤

집 근처 논술학원에 바로 등록했다.

참혹했던 수리영역 점수는 흐린 눈으로 못 본 체하고

논술로 역전시켜 보겠다는 전략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때부터 고전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바카라읽고 글을 쓰고 나면 50대 아저씨 선생님께 첨삭을 받았다.

선생님은 항상 "왜?"를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 장면이 중요했는지,

왜 그 인물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하기 싫은 과목 대신

읽고 사유하며 배우고 즐겁게 다녔었던 유일한 학원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낙방과 함께 논술학원과도 자연스럽게 작별했다.

논술로 인생을 뒤집겠다는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하지만 단연코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윤리와 사상이었다.

늘 메가스터디에 로그인해서 손사탐 인터넷 강의를 좋아하는 드라마 보듯 몰입해 공부했었다.


나는 이때부터 손주은 대표의 팬이 되었다.

내가 읽은 교과서 내용을 한 차원 올려주는 족집게 강의력에 감탄했다.

더불어 인생이 만만하지 않다는 현실을 강의 중간중간 험한 말로 들으며 정신 각성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대 때 영어 강사로 일하면서

30대에는 대형 강의로 방향을 전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나서

가장 먼저 준비했던 곳도 메가스터디였다.(하지만 대치동이 아니라 결혼과 지방 이사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최근에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인문학 관련 바카라을 읽게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슬롯에서 철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행간을 읽게 만드는 바카라이었다.


'와, 이 바카라은 필사해야겠다.'

바카라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저자를 찾아봤다.

요즘 미디어를 통해 익숙한 서강대학교 철학과 최진석 교수님의 바카라이었다.

문득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재미있는 건 바카라 내용 중에 전공생들 입학 면접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만약 내가 저 면접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에 인문학 바카라을 읽다가 갑자기 약간 서늘해졌다.


우리 과 면접 때 우리 학교 영어대학에 무슨 전공들이 있는지 말해보라는 간단한 질문에

0.1초 만에 바로 대답했는데(틀리게 말하지도 않았음) 냉소적인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후에 대학원생이 되어 술자리에서 해당 교수님께 웃으며 그때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원래 항상 시니컬하신 분인데 이때는 웃으셨다.(이 외에 내가 결석사유로 전치 2주 진단서 냈을 때도 2주면 움직일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보신 적도...)


아무튼 최진석 교수는 그 일화에서

철학으로 한국 슬롯를 건설적으로 이끌고 싶다는 학생보다,

그냥 노자의 바카라이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는다는 학생에게 강하게 끌려서 합격시켰다고 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대학원생의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순간 철학서가 아니라 러브레터를 읽는 줄 알았다.

사실 정말 러브레터일 것이다. 철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학자에게 보내는.


저자는 바카라 전반에 걸쳐

자신의 욕망을 따라,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제시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미친듯이 읽는 사람이되라고.



좋아서 하는 일로 씨앗을 심어두면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것처럼 언젠가 점들을 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나에게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윤리와 사상을 좋아했던 것도,

논술학원에서 고전을 읽었던 것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결국은 같은 질문 때문이었다.

인간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왜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가.



그래서 오늘 내가 읽은 바카라은 단순히 한 권의 독서가 아니라,

미래의 어떤 지점으로 이어질 연결선처럼 느껴진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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