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드디어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사실 착륙하기 직전까지는 내가 정말 유럽에 왔다는 게 크게 실감 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생각보다 익숙했다.
바다가 보이고, 바다 위에는 배들이 떠 있고, 육지에 가까워지면서 농사를 짓는 지역이 나타났다.
조금 더 날아가니 건물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곧 기내에 착륙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다른 나라에 갈 때도 몇 번 봤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느낌이 달라졌다.
표지판에 영어와 함께 스페인어가 적혀 있었다.
그동안 가까운 해외여행을 하면서 일본어나 중국어가 적힌 표지판은 여러 번 봤지만, 스페인어가 가득한 공간에 내가 직접 서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금발 머리의 서양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아, 진짜 스페인에 왔구나.’
나는 유럽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다. 나에게 유럽은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곳이었고, 선진국이었고, 영화나 사진에서 보던 멋진 도시들이 있는 곳이었다. 화려한 문화제와 드높은 성당이 나를 반겨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앞으로 보게 될 것들이 기대됐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뭔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대문이 우리를 반겼고, 영화에서나 보던 큰 문을 열자 생각보다 작은 체크인룸이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체크인을 마친 뒤 방 번호를 확인했다.
'201'
2층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있어 계단으로는 올라가기 힘들었고, 주변을 살펴보니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보던 엘리베이터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무로 된 작은 엘리베이터였다.
크기가 정말 작았다. 얼마나 작던지, 사람 한 명과 캐리어 하나를 실으면 더 이상 무언가를 넣을 수 없을 정도였다. 친구와 내가 캐리어를 들고 함께 타기 어려울 정도여서 친구가 먼저 올라가고 내가 뒤이어 올라갔다.
처음에는 그것도 신기했다. ‘와, 유럽에는 이런 엘리베이터도 있구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2층을 누르려했다.
[0 층 , 1 층 , 2 층...]
그렇다. 서양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1층을 0층 혹은 Ground floor로 불러 2층이지만 우리한테는 3층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버튼에는 숫자로 표기되어 있어서 헷갈리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 도착하였고, 복도에서 캐리어가 밖에 꺼내진 채 친구는 방 앞에서 멀뚱히 서있었다.
친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친구가 방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와... 어떻게 해야 되지..?"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숙소 내부를 봤다.
작았다... 생각보다 꽤 많이 작았다... 호화스러운 대저택을 생각했던 거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이즈의 숙소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상상했던 유럽의 숙소와는 꽤 달랐다.
우리가 낸 숙박비는 총 408,135원이었다. 3박이었으니 계산하면 1박에 약 136,000원 정도였다.
스페인에서 엄청나게 비싼 호텔을 예약한 건 아니지만, 이 방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받은 느낌은 솔직히 한국에서 13만 원보다는 훨씬 저렴하게 묵을 수 있는 오래된 작은 숙소에 가까웠다.
'우리 여기서 지낼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짐을 풀고 정리를 하였다. 물론 매우 작았지만, 아기자기하게 옷과 물품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화장실을 구경하려고 들어갔다.
화장실은 대부분의 화장실과 비슷하였다. 세면대가 있고, 변기가 있고, 샤워부스가 있었다.
솔직히 설마 설마 하면서 들어갔었다. 숙소가 작고 오래된 보여서 변기도 양변기가 아닐까 봐...
변기는 다행히 양변기였고, 그 옆에 샤워부스는 숙소 사이즈에 맞게 작았다.
그런데 변기 옆에 이상한 물건 하나가 있었다.
작은 세면대처럼 생긴 것이었다. 보통 세면대의 앞은 'ㄱ'자로 꺾여있는데 이 세면대는 물줄기가 앞을 향하여 있었다. 이런 세면대는 나도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다.
"저쪽에 세면대가 있는데 왜 굳이 세면대를 하나 더 뒀을까?"
높이도 애매하고 크기도 애매했다. 나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줄기를 확인했다.
물줄기는 앞으로 나오다가 약한 수압에 곧 금방 아래로 휘었다.
"글쎄.. 유아용 세면대인가?"
어린아이들은 키가 작아 성인용 세면대를 사용하기 어려운 점, 손을 깊이 넣기 불편하여 항상 팔꿈치 부분이 물에 젖는 점이 불편하다면..? 유아용 세면대를 만들면 될 일이다! 이거다!
"와... 유럽은 확실히 선진국이다... 아동 복지가 진짜 좋은 거 같아.."
친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핸드폰으로 뭔가를 찾는 듯하였다.
세면대 근처에는 작은 수건도 두 장 정도 있었다. 수건은 세로로 길었다. 아마 아이들이 손을 씻고 물기를 닦기 불편할까 세심한 배려였다. 이런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분명 아동이 다니기에는 불편한 나라일 것이다. 나는 손을 씻고 그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하지만 이 수건은 너무 작아 재미 삼아 사용했지, 실질적으로 활용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그 수건에 물을 축여 창틀에 올려놓고 숙소 내의 가습을 돕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숙소의 습도가 기분 좋은 상태까지 올라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숙소 안에서 보물찾기 하듯 이곳저곳 뒤져보고 있었다. 작을 줄 알았던 숙소에는 꽤 많은 수납함이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얘기했다.
"저거... 세면대 아니야..."
유아용 세면대를 가리키며 얘기하였다.
"그럼 저게 뭔데?"
키가 작고 물이 나오는 이건 분명한 유아용 세면대였다.
"저거 비데래..."
내가 알던 비데는 변기에 붙어 있는 전자식 비데였다.
그런데 유럽에는 이렇게 별도의 도기 형태로 만들어진 비데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저게 비데라고? 그러면 저걸 어떻게 써..?"
여기까지는 그냥 문화 차이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근데 절대 그 근처에 있는 수건 쓰지 말래."
근처에 있던 수건은 이미 손을 닦은 뒤 욕실 바닥 앞에 깔아놓았다.
"왜? 이미 창틀 위에 물 축여서 올려놨는데??"
그때 친구가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하였다.
"빨리 저거 치워! 저거 비데를 사용한 뒤 밑을 닦을 때 쓰는 수건이래!"
잠깐만...
그러면 나는?
이미 그 수건으로 손을 닦았고, 그것도 모자라 수건에 물을 축여 창틀에 올려놓았다 가습을 위해...
?!?!?!?!?!?!?!?!?
으아아아아...
바로 수건을 치웠다.
내 첫 유럽 숙소에서 나는 작은 엘리베이터와 작은 방에 놀라고, 비데를 세면대로 착각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건으로 손까지 닦았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상상했던 유럽과 실제 유럽 사이에 벌써 꽤 큰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한동안 충격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이 대략 저녁 8시쯤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하늘은 내가 한국에서 익숙했던 저녁 8시의 하늘이 아니었다.
내 체감으로는 한국의 오후 2시쯤 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환했다.
나는 여행할 때 나름대로 지키려고 하는 원칙이 하나 있었다.
가능하면 밤 10시 전에는 숙소로 돌아오자.
낯선 외국이고, 안전 문제도 있으니까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저녁 8시인데 해가 떠 있었고 저녁 9시가 됐는데도 돌아다닐 만했다.
내가 시간으로 만들어놓은 안전 원칙과 눈앞의 상황이 전혀 맞지 않았다.
결국 첫날부터 그 원칙은 가볍게 깨졌다.
여행이라는 것이 계획과 원칙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일로 다시금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서히 해가 저무는 밤 9시까지 우리는 바르셀로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밤 10시쯤, 저녁을 먹으러 **비니투스(Vinitus)**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맛집을 검색하면 1순위로 나오는 맛집이 '비니투스'다.
우리도 한국인이 뽑은 바르셀로나 1등 맛집을 찾기 위해 비니투스를 찾았다.
식당 앞에는 이미 대기가 있었다. 나는 가게 앞 종이에 내 이름과 인원수를 적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내 앞에 사람이 얼마 없어 금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식당 내부에 들어가니 손님들이 북적북적하였다.
저마다 음식과 술을 한 잔씩 마시며 알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포크와 나이프 접시, 그리고 영어로 적혀있는 메뉴판이 테이블보처럼 세팅되어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검색을 했고, 메뉴를 서칭 하였다.
꿀대구(Bacalao al “allioli” de miel.)가 이 집의 시그니쳐라고 하였다.
"이거 한 개랑 샹그리아 두 잔 주세요" 주문은 잘 들어갔고, 이내 메뉴가 나왔다.
촉촉한 대구 요리에 달콤한 맛이 더해져 있었는데, 생선살이 정말 부드러웠다.
칼로 적당히 잘라 입에 넣으면 제일 처음은 짭짤한 치즈가 느껴졌고, 이내 겉에 묻은 꿀이 달콤하게 맛을 내 단짠의 조합이 너무 좋았다. 그리곤 뒤에서 대구살이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드러운 생선에 단맛이 붙는 조합도 나한테는 꽤 새로웠다.
우리는 다른 타파스와 계란이 올라간 감자튀김도 주문했다.
샹그리아는 우리나라에서 먹는 샹그리아와는 맛이 너무 달랐다. 와인의 풍성한 향과 바디감이 밑에서 모든 맛과 향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위에 오렌지 새콤달콤한 맛과 레몬의 시큼한 향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원한 샹그리아를 먹고 나니 입안이 너무 상큼하게 바뀌었고, 금세 깔끔하게 바뀌었다.
깔끔해진 입을 채우기 위해 나는 다시 꿀대구를 먹었고, 먹고 나면 입안에 달고 진한 맛이 남았다.
그때 샹그리아를 다시금 한 모금 마셨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근처 마트에서 와인과 치즈, 하몽을 샀다.
숙소는 여전히 작았고, 엘리베이터는 두 명이 탑승하니 꽉 찼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 피곤한 몸으로 테이블 앞에서 주섬 주섬 2차를 준비하였다.
테이블 위엔 레드와인과 치즈, 하몽을 올려놓았다.
와인을 잔에 따르고 하몽을 먹었다. 하몽은 소시지도 아니고, 햄도 아닌 생각보다 질기고, 생각보다 짠 음식이었다.
하지만 와인과 먹으니 짭짤함은 상쇄되고, 와인의 풍미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하몽과 치즈를 같이 먹어보니 치즈의 고소함과 지방의 풍미가 진해졌다.
와인을 마시며 친구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아침에는 비행기 안에서 유럽까지 언제 도착하나 절망하고 있었고,
도착해서는 숙소를 보고 놀랐고, 비데를 세면대로 착각했고, 수건 하나 때문에 경악했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는 밤늦도록 밝은 바르셀로나 거리를 돌아다니고,
꿀대구를 먹고, 샹그리아를 마시고, 지금은 숙소로 돌아와 와인과 치즈와 하몽을 먹고 있다.
유럽에 여행을 왔지만 뭔가 내가 상상했던 유럽과는 달랐다.
모든 것이 신식이고, 모든 것이 경이로울 것 같았던 유럽은 생각보다 일상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내가 처음으로 실제 유럽을 보기 시작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세련된 곳도 아니었고, 모든 것이 내가 살던 곳보다 좋은 것도 아니었다.
불편한 것도 있었고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동시에 처음 보는 것과 처음 먹어보는 것들이 계속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그걸 하나씩 직접 경험하고 있었다.
내 첫 유럽 여행의 첫날은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