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나에게 유럽 여행을 가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나는 지금껏 유럽을 단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다. 사실, 유럽 뿐만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자주 가보질 않다보니 해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나의 발목을 잡았었는지도 모른다.
금전적인 문제도 한 몫하였다. 누군가에게는 해외여행으로 이 삼백이 우습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 거대하게 느껴지는 금액이였다.
하지만 왠지 이때가 아니면 앞으로 유럽에 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 가지 않으면 안가봤던 순간이 언젠가 ‘그때 그냥 갈걸’ 하고 미련과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유럽의 목적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러간다거나 혹은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에그타르트를 먹으러 간다는 둥의 거창한 목표는 아니였다.
심지어 나는 스페인에 도착할 때 까지 '가우디' 라는 사람이 있는 지 조차 몰랐으니깐...
그러면 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가게 되었냐고? 같이 여행을 간 친구가 이미 다른 지역을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신사의 나라 영국, 미식의 나라 프랑스를 가보고 싶었지만 이왕 가는 거 둘 다 처음인 곳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출발 전부터 느끼는 감정이 친구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나에게 유럽은 동경의 대상이자 미지의 세계에 가까웠다.
오랜 역사와 문화가 남아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있고, 거리에는 내가 사진이나 영화에서만 보던 풍경들이 펼쳐지는 곳.
그런 유럽을 드디어 직접 간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긴장도 됐다.
출발은 인천국제공항이었다.
바르셀로나까지 경유 없이 한 번에 가는 직항 편이었고, 맘 편히 가기 위해서 대한항공을 타기로 했다.
여행 가기 전 나는 유렵 여행 관련된 카페를 열심히 찾아봤고, 거기에서 꽤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들이
"6시간 이상 비행하는 경우에는 무조건 국적기 타야돼"
라고 하길래 나 역시 여행 선배들의 충고를 충실이 따랐다.
나는 제주도나 해외여행 갈 때 돈이 부담되어 저가항공만 타고 다녔는데 국적기라니... 나에게는 이 마저도 너무 설레었다.
돈은 비쌌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풍족했다. 인천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비행시간은 약 14시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14시간 동안 비행기 좌석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당시에는 그 14시간조차 설렜다.
한숨 푹 자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스페인이라니! 그 자체가 나한테는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설렘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비행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슬슬 몸이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귀는 비행기 엔진소리 때문에 멍먹한거 같고, 허리는 끊어질 것 처럼 불편하고, 다리에도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창밖도 보고, 비행기 안도 구경하고, 이것저것 만져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상황은 익숙해져갔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좌석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안내방송에서 곧 기내식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기대가 생겼다.
‘대한항공 장거리 국제선 기내식은 얼마나 잘 나올까?’
이내 기내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승무원은 나에게로 와 친절히 말해주었다.
"식사는 오징어덮밥과 닭갈비 중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나는 오징어덮밥을 골랐다.
그리고 기내식을 처음 받아보고 조금 신기했다.
밥 공기부터 반찬 그릇까지 모든 식기는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었고, 음료 서비스도 물, 음료, 주류 중 다양한 고를 거리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 사소한 경험 하나 하나가 신기함이였다.
‘오? 생각보다 잘나오는데?’ 오징어는 크기도 크고, 다리도 통통했다.
나는 기내식을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먹던 양보다 밥이 너무 적었다. 그래도 기내식이니까 어영부영 다 먹었지만 다 먹고 나서도 배가 차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 다른 사람들은 이걸로 배가 차나..? 하나 더 달라고 해볼까..? 그러다 진상 되는건 아닐까..?'
정말 그 짧은 순간에 수 만번을 고민하였다. 그러다 결국 승무원에게 물어봤다.
“저… 혹시 죄송한데 기내식 남은 거 있을까요?”
다행히 승무원이 웃으며 남은 게 있는지 확인 해주겠다고 하였고, 닭갈비 한 품목이 남아 있다고 했다.
“드릴까요?”
당연히 감사하다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고 음료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남들 음료수 받을 때 도시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곤, 열어서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나는 유럽에 처음 가는 비행기에서 기내식 한 타임에 두 끼를 먹는 남자가 됐다.
배도 채웠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시간이었다. 도대체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싶었다.
중간 중간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봤지만, 평소에 재미있게 보던 영화도 이상하게 집중이 안되고, 자극적인 드라마의 내용도 귀에 안들어왔다.
몸이 찌뿌둥하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만이 나를 그곳에 집중 시키고 있었다.
이때, 남은 시간을 빠르게 단축시킬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술을 마시면 잠드는 편이라 빠르게 마시고 자는 거였다.
일단 승무원에게 맥주 한 캔을 더 부탁했다.
물론 아까 전에 식사 중 맥주를 마셨지만 그냥 밥 먹을 때 먹는 음료수 같았다.
그래서 한 캔을 더 마시고 자려는 방법을 구상하였다.
승무원이 맥주를 갖다 줬고, 나는 맥주를 받아 뚜껑을 따 안주 없이 맥주를 벌컥 벌컥 마셨다.
맥주를 마시니까 약간 취기가 올라왔다.
이제 슬슬 자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잠들 만큼 취한 것도 아닌 것 같고 , 그렇다고 멀쩡한 것도 아닌 묘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옆 자리에 앉은 손님이 "술은 무슨 종류가 있어요?" 라고 물었고, 승무원은 '진, 보드카, 맥주'가 준비되어있다고 답하였다.
그래서 또 하나의 훌륭한 판단을 했다.
‘아.. 다양한 주류가 준비되어있구나... 근데 나 조금만 더 마시면 자겠는데..?’
이번에는 보드카 한 잔을 부탁했다.
이때부터 갑자기 상황이 이상해졌다.
취기가 서서히 올라오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확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몸은 술에 취한 것 같은데 정신은 이상하게 멀쩡했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계속 메슥거렸다. 토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원했던 잠은 안 왔다.
이게 제일 최악이었다. 술을 마신 목적은 14시간을 편하게 자면서 보내기 위해서였는데,
취하기만 하고 속은 메슥거리고, 잠은 못 자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 거다.
그 상태로 한참을 고생했다.
속은 계속 안 좋고, 몸은 불편하고, 잠은 안 오고, 중간에는 승무원에게 라면도 부탁해서 먹었다.
지상에서는 라면을 먹으면 땀이 나면서 해장이 되는 느낌이 있는데, 비행기에서 라면을 먹으니 오히려 더부룩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제 꽤 많이 왔겠지...’ 나름 희망적인 상황이라 생각했다.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식사도 하였다.
오렌지 주스 한 잔에 맥주 두 캔, 그리고 보드카도 한 잔을 마셨다.
심지어 해장을 하기 위해 라면과 이런저런 주전부리까지 먹었다.
이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으니 체감상으로는 비행기를 탄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래서 시간을 확인했다.
3시간.
……
3시간?
내 기억으로 전체 비행시간은 약 14시간이었다.
'앞으로... 11시간이나 남았네...?'
'와... 조졌다... ' 진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심지어 앞 좌석 화면에서는 현재 비행기가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도 보여줬다.
위치를 봤는데... 몽골이었다. 아무리 봐도 스페인은 멀었다.
얼마나 남았는지, 몽골과 스페인이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아 손가락으로 화면을 옆으로 밀어야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부터는 여행이라기보다는 버티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
영화를 틀고 억지로 봤다.
드라마도 틀었고, 이것도 억지로 봤다.
뭘 봤는지는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냥 내 목표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뭔가를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이였다.
속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처음 비행기에 탔을 때만 해도 14시간이라는 숫자조차 특별하게 느껴졌다.
‘와, 내가 14시간을 날아가서 유럽을 가는구나.’
그런데 불과 3시간 뒤에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제발 좀 도착했으면 좋겠다.’
내 첫 유럽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우디도 보기 전이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보기 전이었다.
샹그리아 한 잔도 마시기 전이었다.
그렇게 나는 멍하니 앞 좌석 화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면 속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