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디테가 남긴 가장 슬픈 약속
사랑은 사람을 살릴까.
아니면 무너뜨릴까.
젊은 날에는 사랑이란 그저 아름다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일리아스』를 읽으며 나는 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를 소유하려는 사랑도 있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 질문 앞에 나를 오래 머물게 했다.
우리는 그녀를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으로 기억한다.
꽃과 향기,
미소와 설렘을 떠올린다.
하지만 『일리아스』 속 그녀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사랑을 선물한 여신이면서도,
한 나라를 전쟁으로 이끈 여신이기도 했다.
파리스는 세 여신 앞에 섰다.
헤라는 권력을 약속했고,
아테나는 지혜와 승리를 약속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사랑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욕망이었을까.
그 선택 하나는 한 사람의 행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헬레네는 평생 죄바카라감을 안고 살아야 했고,
안드로마케는 남편을 잃었다.
헤카베는 아들을 잃었고,
브리세이스와 크리세이스는 전리품이 되었다.
카산드라는 다가올 비극을 보면서도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수많은 여인들의 삶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무너져 내렸다.
그 대목을 읽으며 문득 내 삶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가.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고,
내 마음을 알아주기만을 바라며,
내 방식대로 사랑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를 내 품 안에 붙잡아 두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 주는 일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된다.
사랑은 상대를 바꾸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기다려 주는 일이고,
믿어 주는 일이며,
필요하다면 놓아주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자유를 닮아 있다.
『일리아스』는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그 전쟁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인간의 욕망이 흐르고 있었다.
명예를 향한 욕망.
승리를 향한 욕망.
그리고 사랑마저 소유하려는 욕망.
호메로스는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는지 조용히 보여 준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약속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약속을 욕망으로 바꾸었다.
어쩌면 비극은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나는 사랑을 다시 배웠다.
사랑은 누군가를 내 곁에 붙잡아 두는 힘이 아니라,
끝까지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래서 『일리아스』를 덮은 뒤에도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사랑의 여신의 아름다운 미소가 아니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중이라는, 삼천 년을 건너온 오래된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