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전쟁은 한 소녀의 눈물에서 시작되었다

by운조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바카라장을 덮고 난 뒤,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남은 것은 한 소녀의 눈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세이스.

트로이의 동맹 도시에서 태어난 사제의 딸이었다.

전쟁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패배한 도시는 무너졌고,

그녀는 승리한 자의 전리품이 되었다.

딸을 되찾기 위해 아버지 크리세스는 그리스 진영을 찾아간다.

손에는 예물을 들었고,

입에는 마지막 희망을 담았다.

"제발 내 딸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자비가 아니라 모욕이었다.

아가멤논은 늙은 사제를 내쫓는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닷가로 걸어간다.

그리고 조용히 하늘을 향해 기도한다.

기도는 바람보다 멀리 날아갔고,

아폴론의 화살은 역병이 되어 그리스 진영을 덮친다.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나서야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낸다.

그러나 잃은 명예를 다른 사람의 삶으로 메우려 한다.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그 순간 아킬레우스는 분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리아스』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다르게 읽게 되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보다 먼저,

한 소녀의 침묵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왕들은 명예를 이야기하고,

영웅들은 영광을 이야기하며,

신들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의 한가운데 있는 크리세이스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고 싶으냐고.

두렵지 않으냐고.

무엇을 원하는지.

단 한 번도.

그녀의 침묵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를 영웅들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헥토르.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이름 없는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움직인다.

누군가의 울음은 기록되지 않고,

누군가의 침묵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가장 작은 울음 하나가 가장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세상에는 크리세이스가 있다.

힘이 없어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

말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

선택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선택 때문에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쉽게 지나친다.

침묵을 체념으로 오해하고,

순응을 동의로 착각한다.

그러나 침묵은 동의가 아니다.

말할 권리를 빼앗긴 사람의 마지막 언어일 때가 있다.

『일리아스』를 다시 펼칠 때마다 나는 첫 장에서 잠시 멈춘다.

사람들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읽는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먼저,

아무도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던 한 소녀를 만난다.

전쟁은 거대한 함성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작은 울음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리아스』를 덮은 뒤에도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영웅의 분노가 아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던 그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