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이 조직의 판단으로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
같은 그룹의 다른 관계사로 전적한 직후였다. 나는 그동안의 경력과 대외 활동을 인정받아 그룹의 데이터 시각화 통합 플랫폼을 맡게 되었다. 관계사로 넘어간 직후, 곧바로 하반기 운영 계획을 만들어 그룹 모기업의 데이터 담당팀에 설명해야 했다. 그룹 차원의 데이터 관련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데이터 시각화 실무 경험과 플랫폼 사용자의 관점을 최대한 반영해 기획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당연히 보고서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했다. 관계사마다 이미 데이터 분석가와 데이터 시각화 도구가 있는데, 우리가 또 하나의 통합 플랫폼을 운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부터 그 타당성을 찾기 어려웠다. 전적하기 전에는 '관계사마다 이미 데이터 시각화 도구가 있는데, 왜 또 하나의 통합 플랫폼을 만들려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래도 회사가 맡긴 방향 안에서 세 가지 이유를 만들었다. 첫째, 외부 시장 데이터를 공동으로 구매해 관계사별 비용을 줄인다. 둘째, 통합 환경과 외부 데이터를 활용한 교육을 제공해 각 관계사의 준비 부담을 덜어준다. 셋째, 데이터와 사용자들이 만든 결과물을 플랫폼에 공유해 각 사의 데이터 문화를 확산하는 거점으로 삼는다. 외부 데이터의 공동 활용, 통합 교육 환경, 콘텐츠를 통한 데이터 문화 확산이라는 세 축이었다.
논리는 있었다. 과거의 실제 사례와 경험을 덧붙였다. 내가 바라본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로'로 그 방향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내가 준비한 세 가지 제안과 연결되지 않았다.
"이거 해야 하나요?"
"비싸고 돈만 들지 않나?"
내 이야기를 들은 건가 싶을 만큼 엇나간 반응이었다. 세 가지 축에 대한 질문도 반박도 없었다. 그들의 질문과 태도를 보며 내 이야기가 그들의 판단과 연결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심지어 새로운 솔루션을 계약해야 하는 계획은 아니었다. 이미 계약한 솔루션을 활용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내 논리에 대한 반박이라기보다, 내 설명이 애초에 그들의 관심사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신호에 가까웠다.
당시에는 그저 설득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룹과 회사의 사정을 조금 더 알게 되면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들에게 이 통합 데이터 시각화 플랫폼은 당장 자신들의 사업계획이나 KPI와 연결된 필수 과제가 아니었다. 회의도 실행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라기보다 형식적인 보고에 가까웠다. 반면 나는 전적하자마자 그 자리에 들어갔고, 그들이 어떤 배경과 제약 안에서 판단하는지 알지 못했다. 플랫폼을 사용할 사람들을 위한 논리는 만들었지만, 그 일을 판단할 의사결정자의 맥락은 비워두고 있었다.
사용자를 위한 논리는 있었지만, 의사결정자의 판단 기준은 빠져 있었다. 내가 제시한 맥락이 그들의 맥락이 아니었다.
나는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 사고의 과정을 거쳤다. '이 플랫폼이 어떻게 잘될 수 있을까?'라는 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서비스를 쓸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제를 정의하고,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러면 조직의 의사결정자에게도 답이 자연스럽게 전달될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내가 답이 될 만한 생각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조직의 답이 되지는 않았다. 한 단계가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사람은 종종 자신의 일이 데이터를 정리하고, 모델을 만들고, 결과를 도출하는 데서 끝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직에서 데이터 분석은 그 지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분석 결과가 의사결정자가 판단을 내리거나 기존 판단을 확인하는 데 쓰이고, 회의와 실행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데이터는 제 역할을 한다. 정확한 분석만으로 조직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회의가 끝난 뒤, 나는 자리에 앉아 방금 전의 장면을 한참 되짚어봤다.
나는 그룹 전체에 필요한 이유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판단해야 했던 것은 이 플랫폼이 현재의 사업계획과 KPI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였다. 사실 그들의 사업계획에는 데이터 시각화 플랫폼의 운영 계획을 포함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맥락을 모른 채 그들의 판단과 무관한 계획을 들이민 셈이었다.
물론 전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실무자인 내가 이러한 맥락도 모른채 그룹 차원의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고 추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몇 주 동안 조직의 맥락과 우리가 이미 맡고 있던 역할을 파악하며,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로 계획을 줄였다. 우리 회사가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관계사의 의사결정과 협조를 전제로 한 일부터 덜어냈다. 우리 회사는 그룹의 데이터 시각화 소프트웨어 대표 계약을 이미 맺고 있었고, 계약상 그룹 구성원에게 데이터 시각화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다른 관계사의 추가 의사결정 없이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일이었다.
플랫폼의 역할도 바꾸었다. 외부 데이터를 더 사서 쌓거나 모든 관계사의 콘텐츠를 담으려는 계획 대신, 우선 추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공공데이터를 활용하는 교육 실습 환경으로 재정의했다. 처음 제안한 세 축 가운데 교육이라는 방향은 유지했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왜 해야 하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가 분명했다. 그래서 실행할 수 있었다.
이 변화는 처음의 계획이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전적 직후에는 알지 못했던 그룹 내부의 맥락과 우리 회사의 역할을 확인하면서, 실행할 수 있는 답으로 다시 수렴한 결과였다. 나는 그룹의 문제를 잘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답을 판단할 사람들의 질문을 모르고 있었다.
이 깨달음은 뼈아팠다. 문제는 분석 능력이나 기획의 논리가 아니라, 설득의 출발점에서 청중의 맥락을 놓친 것이었다.
앞서 커머스 분석가는 디자인 사고를 수행하며 온라인팀이 업무의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대시보드를 만들고 다듬었다. 실제 운영 데이터가 쌓이자 팀은 같은 화면을 보며 매장별 차이를 짚고 다음 행동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 화면에서 얻은 해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실행을 제안하는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온라인팀은 일부 매장에서 QR로 온라인 가입과 앱 이용을 안내하는 시범 운영을 진행했다. 분석가는 대시보드로 대상 매장의 운영 전후 변화를 살피고, 현장의 실행 기록도 함께 검토했다. 온라인 가입과 앱 재방문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보였지만, 구매 효과를 단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온라인팀은 매장별 운영 조건과 측정 방식을 보완한 뒤 대상 매장과 기간을 조금 넓혀 두 번째 시험을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시험은 온라인팀만의 판단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추가 예산을 쓰려면 상위 조온라인 게임의 승인이 필요했고, 매장 운영에는 현장의 협조가 필요했다. 데이터 조직과는 고객 데이터를 어디까지 연결할 수 있고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논의해야 했다. 시범 운영의 결과와 기록은 다음 시험을 설계하고 여러 조직의 승인과 협조를 구하는 데 함께 쓰여야 했다.
그렇다고 '결과가 긍정적이니 확대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할 수는 없었다. 시선은 가설과 지표를 설계하고 결과를 분석한 커머스 분석가에게 쏠렸다. 조직은 분석가에게 데이터에 근거한 판단 자료를 만들어 보고하기를 바랐다.
분석가는 이제 데이터를 더 분석하는 일과는 다른 질문 앞에 섰다. 온라인 성과의 가능성과 매장별 실행 편차, 운영 부담을 어떤 순서와 근거로 설명해야 조온라인 게임이 전면 확대와 중단 사이에서 제한된 두 번째 시험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을까. 문제 해결 과정에서 실무의 답은 얻었다. 그러나 그것을 조직이 실행할 답으로 만드는 설득은 이제 시작이었다.
다행히 설득은 감에만 의존하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설득이라고 하면 흔히 타고난 말솜씨나 개인의 커뮤니케이션 감각을 떠올린다. 내가 만난 데이터 실무자들도 설득의 필요성은 알지만, 체계적인 방법을 배우기보다 각자의 경험과 감각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의 정치와 법정에서 현대의 마케팅과 경영,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설득하는 원칙은 오랫동안 연구되고 다듬어져 왔다.
나는 설득의 원리를 데이터의 세계 바깥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났다.
그는 법정과 정치의 무대에서 사람들이 설득하는 방식을 연구해 수사학(Rhetoric)으로 체계화했다. 수사학을 각 상황에서 가능한 설득 수단을 발견하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2,400년 전의 이론이 21세기 데이터 분석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의 논리가 지금의 데이터에도 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읽어 내려갈수록 내가 현장에서 겪은 실패를 설명할 언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는 사람이 마련할 수 있는 설득 수단을 세 갈래로 나누었다.
파토스(Pathos). 청중이 어떤 감정 상태에서 말을 받아들이는가를 다룬다. 같은 주장도 분노와 두려움, 기대와 안도 속에서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 이미 우리도 경험하고 있다. 상사가 기분이 좋을 때 우리의 보고서가 더 승인되기 쉽다는 것을.
로고스(Logos). 말 자체에 담긴 논증과 증명을 다룬다. 주장과 근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의 문제다. 이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보통 설득되지 않는 자료를 앞두고 가장 많이 하는 피드백이 '논리적이지 않다'일 것이다.
에토스(Ethos). 말하는 이의 성품이 연설을 통해 신뢰할 만하게 드러나는가를 다룬다. 마찬가지로 이 영역도 경험했을 것이다. '신뢰할만한 사람의 이야기'는 당연히 더 신뢰되기 쉽다.
이 구분을 데이터 실무에 대입하자 세 가지 질문이 보였다. 청중은 어떤 상태와 맥락에서 데이터를 받아들이는가. 왜 그 판단이 타당한지 논증을 따라갈 수 있는가. 정보와 전달자를 신뢰할 수 있는가. 어느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조직의 데이터 분석가로서 겪은 장면들을 떠올리며 바카라상 위에 설득과 관련된 논문을 펼쳐 놓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축을 내가 겪어 온 현장의 언어로 번역하며 박사 논문의 서론을 쓰기 시작했다.
파토스와 공감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다만 청중의 감정 상태가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대목은 데이터 실무에서 청중의 공감(Empathy)을 이끌어 내는 일로 옮겨볼 수 있다. 감정을 자극해 억지로 감동시키자는 뜻이 아니다. 데이터 속에서 누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 주어 청중이 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 회의에서 놓친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나는 플랫폼 사용자를 위한 논리를 보여줬지만, 의사결정자들이 그 문제를 자신들의 판단과 연결하게 하지는 못했다.
사실 공감은 이미 디자인 사고에서도 등장했다. 다만 그때는 '우리가' 사용자를 공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번에는 공감의 주체가 바뀐다. 설득 자료를 보는 사용자나 의사결정자가 '우리의 이야기에' 공감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디자이너의 눈으로 보면 설득 자료도 하나의 프로덕트다. 그렇다면 그 자료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사용자다. 그가 문제를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이 판단해야 할 일로 받아들일 때 설득의 가능성이 커진다.
로고스는 논리(Logic)로 이어진다. 다만 여기서의 논리는 통계적 유의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장과 근거와 해석을 연결하는 논증뿐 아니라, 사람이 그 논증을 어떤 순서로 보고 이해하며 기억하게 할지 정하는 전달의 논리까지 포함한다.
에토스는 이 바카라에서 형태(Form)로 확장해 다룬다. 이 대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본래 에토스는 화자의 성품과 신뢰에 관한 개념이다. 조직에서도 성실하고 과장하지 않으며 약속한 일을 해 온 사람이라는 평판은 그가 전하는 내용에 설득력을 더한다.
하지만 데이터 기반 설득에는 발표자가 없는 순간도 많다. 대시보드와 보고서는 만든 사람을 떠나 혼자 전달되고 읽힌다. 이때는 정보의 형태가 전달자를 대신한다. 어떤 매체에 담겼는지, 정보 구조가 분명한지, 시각화와 보고서가 정돈되어 있는지가 신뢰에 영향을 준다. 같은 데이터라도 숫자만 빼곡한 엑셀 표, 정돈된 대시보드, 해석을 담은 리포트는 서로 다른 인상을 주고 신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 바카라에서는 에토스를 신뢰를 형성하는 전달의 형태와 구조까지 넓혀 사용한다.
공감(Empathy), 논리(Logic), 형태(Form)
나는 세 단어 아래에 한 문장을 적었다.
공감은 의사결정자의 마음의 문을 열고, 논리는 생각의 길을 만들며, 형태는 그 판단에 신뢰의 옷을 입힌다.
이제 무시당한 대시보드와 의사결정에 닿지 못한 데이터 시각화 계획을 비롯해, 지금까지 겪어 온 실패를 이 세 축으로 다시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설득이라는 말의 무게를 정확히 해두자.
답이 없는 문제에서는 하나의 검증 규칙으로 절대적으로 옳은 결론을 확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데이터 기반 설득은 정답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의 과정을 설계하는 일이다. 분석 결과를 예쁘게 포장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 바카라에서 데이터 기반 설득은 다음 다섯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이 문제는 누구에게 왜 중요한가?
우리는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삼고 있는가?
그 데이터에서 어떤 해석을 도출했는가?
왜 다른 해석보다 이 판단이 더 타당한가?
상대방은 어떤 형태로 받아들일 때 가장 잘 이해하고, 신뢰하며, 판단에 활용할 수 있는가?
첫 질문이 공감의 일이고, 가운데 세 질문이 논리의 일이며, 마지막 질문이 형태의 일이다.
이 구조는 박사 연구와 현업 실무자들과의 워크숍을 거치며 다듬었다. 이제 첫 번째 축인 공감으로 들어갈 차례다. 다음 장에서는 판단하는 사람의 바카라임과 조건을 읽는 일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