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와 마라도를 걷다.
어김없이 출발은 제주버스터미널이다. 여행 계획 단계에서부터 가파도와 마라도를 걸을 생각을 했고 배편을 모두 예약했다. 하루에 섬 두 곳을 돌아보려면 시간이 빠듯할 수도 있어서 최대한 빠른 배 시간을 찾아 예약했던 터라 버스도 첫차를 타야 했다.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달리는 버스로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다.
어제 한라산을 완주한 뒤라 피로감이 남아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고 개운하게 일어났다. 저녁에 미리 챙겨놓았던 배낭을 들고 가볍게 숙소를 나섰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잠깐 쪽잠을 자면서 운진항에 도착했다.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배표 확인 등의 절차를 끝내고도 출발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아있어서 운진항 주변 풍경을 보기 위해 걸었다. 습도가 높아 잠시 망설였지만 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되도록 땀을 많이 흘리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조업을 하고 있는 풍경,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하는 인부들 모습, 그 양식장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 거리는 갈매기들, 김양식장 등을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혼자서 고요한 바닷가를 걷다 보니 여행 오기 전부터 떨쳐지지 않았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하나둘씩 감정의 밑바닥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보다는 담백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선택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갈등의 근원은 무엇이었는지, 다른 해결바카라은 없었는지, 이 선택의 결과가 훗날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등을 하나씩 정리해 가며 생각을 마무리했다. 떠오르는 대로 하나씩 답변을 달아보았다. 똑같은 질문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았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나면 어떤 결정도 수월해진다. 올바른 방향을 잡고 가면 노선이 잠시 변경돼도 돌아오면 된다. 돌아오는 것이 부끄럽거나 귀찮아서 그냥 달리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도달하는 곳은 결국 내가 원하는 곳이 될 것이라 믿는다.
승선 시간이 가까워져서 미리 승선장에 와 기다렸다. 가족 단위로 여행을 온 사람들도 있었고, 단체로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온 사람들도 두 팀이나 됐다. 배 안이 바글바글할 것 같다. 조용한 자리에 앉아 바다를 보면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랐다. 여행이 계획대로 되는 거 봤어?!
다행히 10분이 짧게 지나갔다. 잠깐 앉았던 것 같은데 벌써 섬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민 따위 없이 가파도 올레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해안선을 따라 걸을 수 있게 여러 곳에 표시가 되어 있었고, 마을로 진입하고 싶으면 가로지를 수 있도록 길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미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관광객들과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 마을의 정취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산이라 불려도 모두 같은 산이 아니듯, 바다도 제주에서 보는 것과 가파도에서 보는 것이 달라 보였다. 해안선이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 가파도가 좀 더 다정한 느낌이랄까.
자전거를 타고 역방향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걷는 사람은 나뿐인가 싶어 머쓱했지만 걷는 게 더 좋다. 다소 느리지만 충분히 눈에 담아 가는 풍경들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라 스스로 위로해 본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해안선을 따라 걷다가 올레길 방향 표식을 따라 언덕을 걸어 오르니 마을로 진입하는 길이 나왔다. 주민들이 사부작사부작 집 앞마당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검은 돌로 쌓아놓은 담에 기대어 담소 나누는 어르신들도 보였다. 대화 내용은 여느 시골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두 분의 일상에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거리를 두며 걸어서 지나갔다.
워낙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서인지 두 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마을로 진입을 했어도 섬이 작아서일까 사방에서 파도 소리는 계속 들리는 것 같았다. 바람소리를 착각한 것인가?
섬의 중간 즈음에 올레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게 공원을 만들어 놓은 곳에서 만난 돌하르방들이다. 익살맞은 표정들이 재미있다. 지나칠까 했던 곳인데 일부러 들어와 보기를 잘했다.
섬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올레길이다. 제주의 옛길을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길 옆으로 밭이 넓게 펼쳐진 모습이 장관이다. 사진에 다 담기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밭 가운데에는 제주 전통 양식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무덤도 보였다.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을 상점들도 곳곳에 있었다. 주민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점들도 곳곳에 있어서 어우러짐이 좋았다. 관광지가 너무 관광지 같기만 해도 피곤한데, 가파도는 그 균형을 잘 맞추어 놓은 듯해서 아늑한 느낌이었다.
올레길 한 바퀴를 다 돌고 싶었지만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배를 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섬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 끝에 와서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야 했다. 이정표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가 뛰어 올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제주 여행을 계획할 때 올레길 걷기만 목표로 잡았다가 하루 정도는 쉬는 마음으로 섬을 다녀오겠다며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었다. 막상 배를 타고 들어와 여유롭게 걷다 보니 나가야 배 시간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전기 자전거를 타고 돌았으면 곳곳을 다 다녔을 텐데, 올레길을 온전히 걸어서 가려고 했던 계획은 무리였다. 아니면 하루 코스로 잡고 오전에 섬에 들어와서 오후에 나가는 배를 타는 일정을 잡았어야 했다. 작은 섬이라 생각해서 가볍게 여겼던 탓이었다. 가파도가 이렇게 예쁠 줄 몰랐다.
운진항으로 나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며 바다멍을 했다.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잠시 존재에 대한 생각을 했다. 답이 없어 답답했던 과거도 떠올랐다.
왜 사는가.
왜 태어났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춘기 때에 실컷 했어야 하는 생각을 서른이 넘어서까지도 했었다. 돌이켜보니 참 바쁘게 살았었다. 휴일에도 쉬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자기 계발을 한다는 이유로 미술관, 박물관,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분주히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것이 정서적 허영심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좋은 공연을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위하여 돈과 시간을 들여 분주히 살고 있는 것인가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 기간 동안 많은 방황을 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로 시작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했을 때 선뜻 답을 찾지 못하면서 그동안 내가 만들어 놓았던 삶의 루틴들이 모두 깨졌다. 삶 자체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며 성실하게 쌓아왔던 나의 견고했던 일상이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답을 찾아야 했다. 무엇이라도 좋다. 내가 사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어떤 허접한 목적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면서 잡히지 않는 것들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 자신이 가엽기도 했고 끝까지 잡히지 않을 무언가에 언제까지 매달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나 조차도 어이없지만 뒤늦은 자아성찰을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열심히 살면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함을 믿고 앞만 보며 달렸었다. 쉬는 법도 몰랐다. 놀고 싶을 때도 참아야 했다. 고3 교실에 "4당 5 락"이라는 문구를 적어 반 아이들을 독려했던 것처럼, 나도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이며 달렸다. 하지만 한계에 부딪히면서 지쳐갔다.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내가 원하는 곳에 가 닿을 수 있을까 하는 망연자실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시기에 내면의 질문이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힘들게 붙잡았던 줄을 놓아버리게 된 것이었다.
그 후로 내 삶은 무질서함 자체였다. 일관성이란 없고 방향성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 하나만 가지고 밀어붙였다. 가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그들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고 나를 다독여 가며 긴 시간을 버텨왔다.
가파도의 바닷가에 앉아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아주 평온하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어떤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나의 길을 잘 가고 있다. 이번 여행도 나에게 쉼을 주기 위해 왔다. 그리고 홀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가파도에서 나와 한 시간 정도 운진항에 머물렀다가 마라도에 들어갔다. 하지만 날씨요정의 장난으로 운진항에서 기다릴 때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마라도에 들어가 있는 내내 비가 내렸다. 섬 전체가 안개에 파묻혀서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우비를 입고 배낭이 젖지 않도록 우산으로 감싸고 다니느라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다. 카메라 렌즈로 보이는 것도 안개뿐이라 사진을 찍는 의미가 없었다.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은 자장면이라도 먹고 가야 한다며 우르르 마라도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차라리 자장면 먹은 추억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마라도에 대한 기억이라도 남겠다. 하지만 그냥 걸었다. 비가 오고 앞은 잘 모이지 않았지만 둘레를 한 바퀴 돌고 대피소에서 비를 피하다가 배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가파도에 남겨둔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섬 속의 섬 여행은 좋은 날을 잡아 다시 와야 할 것 같다. 마라도에서 바다를 전혀 볼 수 없었던 것까지 다음에 다 보상받을 날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오늘의 일정은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