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바카라을 고칠 때 서두르지 않았다.
오래된 바카라의 표지가 떨어지면 먼저 바카라등을 살폈다. 실이 끊어진 자리를 찾고, 종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확인한 뒤에야 바늘을 들었다. 억지로 잡아당기면 당장은 붙어 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벌어졌다. 손상된 자리를 감추는 것보다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아는 편이 중요했다.
그녀가 제본 일을 배운 것도 그런 식이었다. 어머니는 고치는 방법을 알려 주기보다 망가진 바카라을 한 권씩 맡겼다. 잘못 꿰맨 실을 풀어 다시 시작하게 했고, 종이가 찢어지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먼저 생각하게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는 작은 제본소를 지켰다.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오래된 바카라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끔 찾아왔다. 그녀는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묻지 않았다. 바카라을 고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들었다.
그 남자가 처음 찾아온 날에도 그랬다.
“이 바카라, 고칠 수 있을까요?”
그가 내민 것은 오래된 시집이었다. 표지는 반쯤 떨어져 있었고, 바카라등에는 여러 번 테이프로 붙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바카라을 펼쳐 안쪽을 살폈다.
“시간은 좀 걸릴 거예요. 새 바카라처럼 만들 수는 없고요.”
“새 바카라처럼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는 첫 장에 적힌 문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사람은 떠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알게 된다.
“이 바카라을 읽어 준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바카라을 맡기고 돌아간 그는 사흘 뒤 다시 찾아왔다. 떨어진 표지를 원래 색과 비슷한 천으로 덧대고, 끊어진 실을 새로 꿰어 놓은 뒤였다. 오래된 흔적을 완전히 감추지는 않았다.
그는 바카라을 받아 한참 동안 표지를 쓰다듬었다.
“잘 고쳐졌네요.”
“마음에 들어요?”
“네. 원래 이랬던 것 같아요.”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가 웃었다. 왼쪽 눈가에 먼저 주름이 잡혔다.
“고친 사람은 알잖아요. 어디를 고쳤는지.”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날부터 그는 가끔 제본소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다른 바카라을 맡겼고, 나중에는 빌려 간 바카라을 돌려주러 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바카라을 들고 오지 않았다.
대신 퇴근길에 빵을 사 왔다. 그녀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소금빵만 골랐다. 그는 작업대 반대편에 앉아 바카라을 읽었고, 그녀는 바늘에 실을 꿰었다.
둘은 바카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음에 드는 문장과 싫어하는 결말, 오래전에 읽은 바카라을 다시 펼쳤을 때 달라지는 기분에 관해서였다. 이야기가 끊겨도 어색하지 않았다.
“사람이 변해서 같은 문장도 다르게 읽히는 걸까요?”
어느 날 그녀가 물었다.
“바카라은 그대로인데 우리가 달라졌으니까요.”
“그럼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나랑 다른 사람이네요.”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된 거죠.”
“말장난 같아요.”
“그럴 수도 있고요.”
그는 바카라장을 넘겼다.
그녀는 그가 웃을 때 왼쪽 눈가에 먼저 주름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집중할 때 오른손 엄지로 왼쪽 검지의 옆면을 문지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둘은 서로의 습관을 알게 되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제본소의 난방기가 고장 났다. 그는 설명서를 찾아 읽고 부품을 주문했다. 그날 안에 고치지는 못했지만, 다음 날 다시 와서 일을 마쳤다.
“고친다면서요.”
그녀가 말했다.
“고칠 수 있다고 했지, 오늘 고친다고는 안 했어요.”
“그럼 내일도 와야겠네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바늘을 쥔 손을 잠깐 멈췄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 웃었다.
“내일 올게요.”
그는 정말 다음 날 왔다.
그날 둘은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렸다. 그녀는 장갑을 가져오지 않아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자기 장갑 한 짝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한 짝만 끼면 당신은 더 춥잖아요.”
“한 손은 따뜻하잖아요.”
“나머지 한 손은요?”
“그 손은 주머니에 넣으면 되죠.”
그녀는 장갑을 받아 들었다. 그의 오른손이 붉게 변해 있었다. 다음 날 돌려주려고 했지만, 막상 그를 만나자 주머니에서 꺼내지 못했다. 그도 장갑을 찾지 않았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그가 제본소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졌다. 바카라을 읽다 해가 지면 저녁을 먹고 갔고, 저녁을 먹다 보면 마지막 버스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는 서둘러 외투를 입었고, 그녀는 작업대 위에 흩어진 종이를 정리했다.
“내일 봐요.”
그가 문을 닫기 전 말했다.
처음에는 인사였던 말이 어느새 약속처럼 들렸다.
그녀는 그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문 쪽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면, 서둘러 바늘과 실을 정리했다.
어느 저녁, 그가 평소보다 일찍 찾아왔다. 손에는 빵 봉투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일이 일찍 끝났어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그리고 보고 싶어서요.”
그녀는 빵 봉투를 받으려던 손을 멈췄다.
제본소 안에서는 난방기가 낮게 돌아가고 있었다. 창가에 놓인 화분의 마른 잎이 바람도 없이 조금 흔들렸다.
“그런 말은 쉽게 하네요.”
“쉽게 한 말 아닌데요.”
그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봉투를 받아 작업대 위에 놓았다. 소금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종이봉투 안에서 모서리가 조금 눌려 있었다.
“나도 기다렸어요.”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실을 주웠다. 굳이 지금 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손끝에 감긴 실을 풀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럼 다음에는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요.”
“어떻게요?”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고. 계속 오면 되죠.”
“그건 너무 간단한데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자신이 한 말을 거둬들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당신이 오는 게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에 놓인 빵 봉투를 옆으로 밀고, 그녀의 손에서 풀리지 않은 실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럼 우리, 이제 그만 좋아하는 척할까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그도 기다렸다.
“좋아요.”
그날 그는 늦은 밤까지 머물렀다. 둘은 함께 저녁을 먹었고, 설거지를 하러 간 그가 물을 너무 세게 틀어 그녀의 소매를 적셨다. 그녀는 수건으로 그의 손등을 때렸고, 그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젖은 소매를 걷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가 물었다.
“내일도 올까요?”
그녀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와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던 손가락이 맞닿았다가 천천히 얽혔다.
그날 이후 둘은 서로를 연인이라고 불렀다. 특별히 선언할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음 날에도 만났고, 그다음 날에도 만났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제본소 문을 열기 전에 노크했고, 그녀는 그가 오기 전에 커피를 두 잔 내렸다.
사랑은 두 사람의 생활에 조금씩 자리를 만들었다.
함께 살자는 말은 예상하지 못한 날에 나왔다.
눈이 녹고 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그녀는 며칠째 기침을 했다. 밤늦게까지 작업한 탓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는 제본소에 올 때마다 약을 사 왔다. 그녀가 약을 먹었는지 확인하고,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다.
“이제 그만 걱정해도 돼요. 감기예요.”
“감기인 줄 알아도 걱정은 되는데요.”
그녀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날 저녁, 그는 제본소의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바카라을 덮고 손목을 주물렀다. 하루 종일 바늘을 잡은 탓에 손가락 마디가 뻣뻣했다.
그가 따뜻한 물을 담은 컵을 건넸다.
“집에 가서 쉬어요.”
“조금만 더 하고요.”
“내일 해도 되잖아요.”
“내일도 일이 있는데요.”
그는 작업대 위의 바카라들을 바라보았다. 고칠 바카라은 늘 쌓여 있었고, 그녀는 그중 한 권도 대충 다루지 않았다.
“혼자 사는 거, 힘들지 않아요?”
뜻밖의 질문에 그녀는 손을 멈췄다.
“갑자기 왜요?”
“아플 때도 혼자고, 늦게 끝나도 혼자고. 내가 매일 와도 집에 돌아가면 혼자잖아요.”
그녀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누군가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는 게 낯설었다.
“당신도 혼자 살잖아요.”
“그러니까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우리 같이 살까요?”
제본소 안이 조용해졌다. 난방기는 오래전에 꺼졌고, 창문에는 저녁의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함께 산다는 것은 늦은 저녁을 같이 먹고 아침에 커피를 두 잔 내리는 일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작업 시간을 지켜야 했고, 그에게도 혼자 있고 싶은 날이 있을 터였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생활까지 저절로 맞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일할 때는 말도 잘 안 해요.”
“알아요.”
“바카라이 쌓여 있으면 약속도 미룰 수 없고요.”
“그것도 알아요.”
“집이 좁아도 괜찮아요?”
“넓은 집을 말한 건 아닌데요.”
그녀는 웃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나중에 후회하면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에 놓인 바카라을 들어 표지를 살폈다. 그녀가 며칠 동안 고치고 있던 바카라이었다.
“후회할 수도 있겠죠. 나도 당신도요.”
그는 바카라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래도 같이 살아 보고 싶어요. 당신이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당신이 있는 집에서 서로 불편한 점을 알아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녀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물은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요.”
“물론이죠.”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날은 함께 제본소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헤어질 때도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혼자 사는 생활은 익숙했다.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늦게까지 불을 켜 놓아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 생활을 계속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컵 하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쓰던 컵이었다. 가장자리에 작은 금이 가 있었지만, 버리지 못하고 오래 사용했다.
그녀는 그 컵에 물을 따랐다.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비워 두는 일이기도 했다. 자기만의 공간을 잃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흔적이 들어올 자리를 내주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 그에게 먼저 연락했다.
같이 살아요.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정말요?
그녀는 웃으며 다시 썼다.
대신 내 바카라은 건드리지 마요.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요?
특히 그때요.
그는 웃는 얼굴을 보냈다.
둘은 다음 주부터 집을 보러 다녔다. 큰 집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본소에서 멀지 않고,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곳이면 충분했다. 오래된 빌라의 작은 방을 구했을 때, 그는 창문을 열어 바람이 통하는지 확인했다.
“여기는 괜찮네요.”
“뭐가요?”
“창문이요. 열어 두면 바람이 들어오잖아요.”
그녀는 창틀에 손을 얹었다. 바깥에서는 누군가 빨래를 걷고 있었고, 골목 안쪽에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여기로 해요.”
그들은 계약서에 나란히 이름을 적었다.
이사하는 날, 짐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녀의 바카라과 작업 도구, 그의 옷과 바카라 몇 권, 주방에서 쓸 그릇이 전부였다. 그는 바카라장을 옮기다가 한 권을 떨어뜨렸고, 그녀는 괜찮다며 바카라을 받아 들었다.
“이제 당신 바카라도 내가 고쳐야겠네요.”
“망가뜨린 사람이 고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럼 평생 맡겨요.”
그녀는 바카라을 바카라장에 꽂았다.
저녁에는 둘이 함께 밥을 지었다. 그는 쌀을 너무 많이 씻었고, 그녀는 반찬을 만들다가 간을 잘못 맞췄다. 밥은 조금 질었고 국은 짰다. 그래도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아 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마친 뒤 그는 냉장고에 메모를 붙였다.
우유.
잠시 고민하더니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소금빵도.
그녀는 메모를 읽고 웃었다.
“빵은 장보기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당신이 사 오면 되겠네요.”
“싫어요.”
“그럼 내가 사 올게요.”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손등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 주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창문은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려 있었다. 바깥에서 지나가는 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가 물었다.
“후회해요?”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찾았다.
“아직은요.”
그가 웃었다.
“나도요.”
그녀는 손가락을 얽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누가 먼저 일어날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 잠들기 전 창문을 얼마나 열어 두는지 같은 것들.
그것들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사랑이 머물 수 있는 자리는 되어 주었다.
그때는 둘 다 그렇게 믿었다.
그 남자에게 서울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 것은 그해 늦봄이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출판사 편집자 자리였다. 급여도 나아졌고, 그가 좋아하는 바카라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제본소의 작업대에 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좋은 일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요?”
그는 종이를 접었다.
“가면 한동안 자주 못 올 것 같아서요.”
“여기가 무슨 친척 집이에요? 자주 오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같이 가자는 말은 안 하네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실을 내려놓았다.
서울로 가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기회였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제본소는 오랫동안 준비해 얻은 자리였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작업대도 이곳에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 자신의 이름으로 바카라을 고치는 일을 시작한 참이었다.
“나는 여기 남고 싶어요.”
“알아요.”
“당신은 가야 하고요.”
“그렇다고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둘은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일 년만 떨어져 지내자고 했다. 자리를 잡은 뒤 다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녀는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서울로 떠나기 사흘 전, 둘은 오랜만에 온종일 함께 보냈다.
그녀는 제본소에 가져갈 바카라을 집에서 정리했고, 그는 거실 바닥에 앉아 바카라등이 떨어진 잡지 몇 권을 분류했다. 잘못 쌓아 둔 바카라 더미가 기울자 그가 급히 손을 뻗었다. 잡지는 무사했지만 옆에 놓인 소금빵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카라은 살리고 빵은 죽였네요.”
그녀가 말했다.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이니까요.”
그는 봉투를 주워 빵을 살폈다. 다행히 바닥에 닿은 쪽은 봉투뿐이었다.
점심은 남은 반찬으로 해결했다. 그녀는 제본소에 가져갈 도구를 정리했고, 그는 서울에 가져갈 짐을 작은 가방 하나에 넣었다. 짐이 너무 적어 보여 그녀가 물었다.
“그게 다예요?”
“바카라은 회사에 많을 테니까요.”
“옷은요?”
“필요하면 사죠.”
“양말은요?”
그는 가방을 열어 양말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떠난다는 사실은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가방 하나에 들어가는 짐보다 그가 없는 집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일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해가 기울 무렵 둘은 동네를 걸었다. 늘 지나던 세탁소와 작은 마트, 오래된 문구점을 지나 빵집에 들렀다. 그는 소금빵을 네 개 샀다.
“왜 네 개나 사요?”
“오늘 먹고, 내일 먹고, 모레 먹으려고요.”
“모레면 서울에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오늘 다 먹어야겠네요.”
그녀는 빵 봉투를 받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둘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는 그가 했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다음 주에 맡길 바카라의 목록을 정리했다. 그가 물기를 닦은 컵 두 개를 나란히 찬장에 넣었다.
잠들기 전, 그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람이 커튼 끝을 건드렸다.
“춥지 않아요?”
그녀가 물었다.
“조금만 열어 두면 괜찮아요.”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가 불을 끄고 옆에 누웠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울에 가도 전화할게요.”
그가 말했다.
“알아요.”
“주말마다 내려올게요. 일이 많아도 가능한 한.”
“무리하지는 말고요.”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날 밤 그녀는 먼저 잠들었다. 그는 한동안 깨어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듣다가, 손을 뻗어 창문이 너무 많이 열려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커튼을 조금 걷어 주고, 침대 아래로 떨어진 그녀의 양말을 주워 침대 옆에 놓았다.
아침이 오면 그는 떠나야 했다.
그는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그녀가 제본소에 나간 사이 그는 집을 나섰다. 역으로 가기 전, 골목 안쪽에 있는 작은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게를 처음 본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 그는 출판사에서 마지막으로 넘겨받은 오래된 시집의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시집은 여러 차례 판을 거듭한 바카라이었고, 초판의 표지와 판권지를 확인해야 했다. 바카라을 펼치자 뒷표지 안쪽에 오래된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이전 소유자가 끼워 둔 메모처럼 보였다.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고, 모서리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기억을 맡기고 다른 하루를 빌리는 곳.
그 아래에는 골목 이름과 번지수가 연필로 쓰여 있었다. 주소는 그가 살던 동네에서 멀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집의 출처를 확인하려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 바카라을 기증한 사람이 남긴 기록에서 같은 문장을 다시 발견했다. 오래된 바카라과 관련된 개인 기록을 정리해 둔 자료였다. 거기에는 가게의 이름 대신 짧은 문구만 적혀 있었다.
가장 행복했던 하루를 맡기면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려주는 곳.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며칠 뒤, 퇴근길에 주소를 찾아갔다. 가게는 실제로 있었다. 유리문에는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문구를 읽다가 돌아섰다.
그날 밤 그는 서울행을 앞두고 정리하던 짐을 다시 열었다.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했다. 아침에 나란히 놓인 컵 두 개, 냉장고의 메모, 그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식탁에서 바카라을 정리하던 그녀.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달라졌다.
그는 그 하루를 잊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을 잊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그날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고 싶다는 마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누군가가 그 하루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 누군가가 그녀라면 더 좋겠지만, 그는 그 일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가게의 문구가 사실인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장난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바카라장과 작은 진열장이 놓여 있었다. 진열장 위에는 제목이 적힌 카드들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벽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행복했던 하루를 맡기면 그날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맡긴 하루 하나로 다른 사람의 하루 하나를 빌릴 수 있습니다.
빌린 하루는 그 하루를 실제로 살았던 사람의 경험입니다. 하루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빌린 하루를 돌려주고 맡긴 하루를 되찾으려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하루를 대가로 내야 합니다.
대가로 내놓은 하루의 기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안내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진열장 안에는 여러 장의 카드가 놓여 있었고, 카드마다 짧은 제목과 맡겨진 날짜가 적혀 있었다. 어떤 제목은 평범했고, 어떤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가게 주인은 장부를 펼쳐 놓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하루를 맡기면, 누가 그 하루를 빌리는지 알 수 있습니까?”
가게 주인은 대답 대신 장부를 그가 볼 수 있도록 돌려놓았다. 장부에는 날짜와 하루의 제목, 맡겨진 순서만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을 적는 칸은 없었다.
그는 그제야 안내문에 적힌 규칙이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제가 맡긴 하루가 누구에게 가는지는 모른다는 거군요.”
가게 주인은 장부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일은 별개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만 하기로 했다.
그는 서울로 떠나기 전날을 맡기지 않았다. 그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대신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한 날을 골랐다.
그날은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였다. 두 사람의 생활이 처음으로 하나의 집 안에 놓인 날. 컵 두 개와 냉장고 메모, 짠 국과 조금 질었던 밥, 소파에서 잠들었던 밤. 그가 사랑을 특별한 약속이 아니라 매일 돌아올 수 있는 장소로 생각하게 된 날이었다.
그는 작은 카드에 그날의 제목을 적었다.
함께 살기 시작한 날.
카드를 건네고 나자 가게 주인은 장부에 날짜를 기록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안내문에 적힌 대로라면, 이제 그날의 기억은 자신에게서 사라질 것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가게 밖의 골목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떠올릴 수 있었던 장면이 더는 잡히지 않았다. 컵 두 개를 놓았던 주방도, 냉장고에 붙인 메모도, 소파에서 잠든 그녀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하루를 맡겼다는 사실만 남아 있었다.
그는 당황한 듯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갑 안쪽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 적어 둔 메모였다.
컵 두 개.
소금빵 봉투.
창문을 조금 열어 둔 방.
그리고 당신.
그는 글씨를 읽었다. 글씨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더 바라보다가 종이를 다시 접었다.
그는 가게를 나섰다.
누군가 그 하루를 빌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그가 기억할 수 없는 곳에 남아 있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를 삼켰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약속대로 연락했다. 그는 새로 맡은 원고가 얼마나 엉망인지, 편집 회의에서 어떤 문장을 두고 다투었는지, 퇴근길에 발견한 작은 바카라방이 얼마나 좋았는지 말했다.
그녀는 제본소의 이야기를 했다. 표지가 찢어진 초판본을 고친 일, 오래된 종이에서 곰팡이 냄새를 없앤 일, 화분에 올라온 풀잎이 자란 일.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왜 말이 없어요?”
그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했다.
“그냥 듣고 있어요.”
“무슨 소리요?”
“당신 숨 쉬는 소리.”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런 걸 듣고 싶어요?”
“네.”
“그럼 더 자주 전화할게요.”
그는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일이 많아졌다. 원고 마감이 늦어지는 날이 이어졌고, 전화는 다음 날로 미뤄졌다. 그녀도 바쁜 날이 많았다. 제본소에 큰 주문이 들어오면서 밤늦게까지 작업해야 했다.
서로의 하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가 보낸 메시지를 읽다가 답장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답장을 쓰려 했지만, 밤새 작업한 바카라의 표지가 잘못 붙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시 바카라을 뜯어냈다. 점심 무렵 그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못했다.
저녁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회의 중이었다.
그날 밤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늦을 것 같아. 내일 전화할게.
그녀는 답했다.
괜찮아요. 일부터 해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라고 해서 언제나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그해 여름, 그는 약속한 휴가에 내려오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맡은 바카라의 출간 일정이 앞당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혼자 바닷가에 다녀왔다. 두 사람이 함께 가기로 했던 곳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수첩을 꺼냈다. 두 사람이 함께 가 보기로 했던 장소가 적힌 수첩이었다. 빈칸에 날짜를 적으려다가 펜을 멈췄다.
다음에 갈 곳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언제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그날 밤 그는 늦게 전화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가 피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지쳐 있었다.
둘은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어려웠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은 화를 내서 해결할 수 없었다.
겨울이 다시 왔을 때 그는 서울에 남기로 했다. 더 나은 자리를 제안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전화가 끝난 뒤 그녀는 수첩을 꺼내 마지막 장을 펼쳤다.
비가 오면 창문을 조금만 열어 둘 것.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문장을 지우려다가 그만두었다.
서울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기 전, 그는 출근길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새벽까지 원고를 검토하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날이 이어졌다.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찼고, 손끝에 힘이 빠져 종이를 떨어뜨리는 일도 있었다. 그는 커피를 줄이고 잠을 늘려 보려 했다.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여러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를 들으러 간 날, 의사는 검사지를 한 장씩 넘기며 설명했다. 흔한 질환으로 보기 어렵고,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며칠 뒤 그는 희귀한 진행성 질환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치료를 시도할 수는 있었지만, 병의 진행을 확실히 멈출 방법은 없었다. 앞으로 어떤 속도로 상태가 나빠질지도 단정하기 어려웠다.
그는 진료실을 나와 한동안 복도에 앉아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병원에 혼자 와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였다.
그녀는 아마 당장 서울로 오겠다고 할 것이다. 제본소를 비우고, 자신이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매일 전화를 걸 것이다. 병원에 함께 가겠다고 할 것이고, 자신이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곁에 있으려 할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돌보는 사람으로만 남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함께 살던 집에서 웃었던 일, 빵 봉투를 나누던 일,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잠들었던 밤보다 병원과 약, 지친 얼굴을 더 오래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선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줄 용기가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결국 병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검사를 더 받아야 한다는 말만 했다. 그다음에는 일이 바빠졌다고 했다. 전화가 짧아졌고, 주말에 내려가겠다는 약속은 자주 미뤄졌다.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요?”
어느 밤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그냥 일이 많아서요.”
“밥은 먹었어요?”
“먹었어요.”
“목소리가 안 좋은데.”
“오늘 회의가 길었어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가 피곤하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자신이 계속 걱정하면 그에게 부담이 될까 봐, 하고 싶은 말을 삼키기도 했다.
그는 통화가 끝난 뒤에도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었다.
화면에는 그녀가 보낸 짧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소금빵 사 놨어요. 다음에 오면 먹어요.
그는 답장을 쓰려 했다.
고마워요. 다음 주에는 꼭 갈게요.
그 문장을 지웠다. 다음 주에 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대신 짧게 보냈다.
고마워요. 잘 먹어요.
그녀는 그 답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전에는 늘 다음에 함께 먹자는 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을까 하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가 내려오지 않는 주말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일이 바쁜 줄 알았다. 출간 일정이 겹치면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도 제본소의 마감을 앞두면 집에 늦게 돌아갔다. 바쁜 시기를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먼저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다. 그가 전화를 받지 못하면 다음 날까지 기다렸고, 답장이 늦어도 다시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이유를 물을 자신은 없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당분간 내려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얼마나요?”
“잘 모르겠어요. 일이 좀 정리되면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어요.”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아프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면서도 통화를 빨리 끝내려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가 서울에서 혼자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고, 어느 날은 출근조차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멀어지는 사람의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붙잡는다고 해서 그가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선택한 생활을 존중하고 싶었고, 자신이 그에게 짐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조금씩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닫지 않으려 했다.
그 마음들은 서로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려왔던 날은 가을이었다.
그는 미리 연락하지 않고 제본소 문을 열었다. 그녀는 작업대에 앉아 낡은 바카라의 실을 풀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왔어요?”
그가 웃었다.
“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움이 먼저였지만, 곧 낯선 감정이 뒤따랐다. 그는 전보다 말라 있었고, 얼굴빛도 좋지 않았다.
“어디 아파요?”
그는 잠시 멈췄다.
“아니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믿기 어려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날부터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둘은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는 예전보다 적게 먹었다. 그녀가 반찬을 더 덜어 주자 괜찮다며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제본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작업대 위에 놓인 바카라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그대로네요.”
“바카라은 계속 들어오니까요.”
“당신도 그대로고요.”
그녀는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보여요?”
그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이렇게 연락이 줄었는지, 왜 내려오지 못했는지, 자신과 함께 살던 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지만 그가 돌아온 지금 그 질문들을 쏟아 놓으면, 또다시 그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만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오늘은 얼마나 있다 가요?”
“저녁 기차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돌아가기 전까지 제본소에 머물렀다. 둘은 바카라 이야기를 했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같은 공간에 앉아 있었다. 예전처럼 편안해지지는 않았지만, 어색함을 견딜 수는 있었다.
기차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소금빵 두 개를 봉투에 담아 주었다.
“서울 가서 먹어요.”
그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다음에는 미리 연락하고 와요. 내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게요.”
그녀는 그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 내려오지 못했다.
병은 조금씩 진행되었다.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했고, 나중에는 휴직을 고민해야 했다. 병원에 머무는 날이 늘었다. 그는 가끔 그녀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더는 괜찮지 않았고,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대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내 온 메시지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창문을 조금 열어 뒀어요.
바람이 많이 불어서 금방 닫았지만요.
그는 그 문장을 읽고 눈을 감았다.
자신이 맡긴 하루를 누군가가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가게를 찾아갔던 날 이후, 그 하루가 누구에게 갔는지 알아보려 한 적은 없었다. 규칙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선택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그녀가 그 하루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이 이루어졌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 남자가 더는 연락하지 못하게 된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가까이 두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고,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며칠 뒤 다시 전화했을 때는 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인지,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울의 출판사에 연락해 볼까 생각했지만, 그가 일하는 곳의 정확한 사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망설였다.
그녀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제본소의 일은 계속되었다. 바카라을 고치고, 손님을 맞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불을 켜면 방이 전보다 넓어 보였다. 컵 하나를 꺼내 물을 마시고, 나머지 하나는 찬장 안에 그대로 두었다.
냉장고의 메모는 떼어 내지 않았다.
가끔 그 글씨를 보다가 문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무엇이 웃긴지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에게 연락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가 바쁜 것을 알았고, 자신도 바빴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만으로 둘의 생활을 이어 갈 수는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제본소 서랍에서 오래된 영수증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처음 함께 살 집을 구하러 다녔을 때 산 커피 두 잔의 영수증이었다. 날짜는 오래전이었다.
그녀는 영수증을 한참 바라보다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그날 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세어 보는 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며칠 뒤, 제본소 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골목 끝의 작은 가게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문에는 낯선 문구가 붙어 있었다.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하루를 맡기면,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려드립니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문구를 한 번 읽고 지나쳤다. 몇 걸음 더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가게는 오래된 서점처럼 조용했다. 안쪽에는 작은 진열장이 있었고, 그 위에 카드처럼 생긴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행복했던 하루를 맡기면 그날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맡긴 하루 하나로 다른 사람의 하루 하나를 빌릴 수 있습니다.
빌린 하루는 그 하루를 실제로 살았던 사람의 경험입니다. 하루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빌린 하루를 돌려주고 맡긴 하루를 되찾으려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하루를 대가로 내야 합니다.
대가로 내놓은 하루의 기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안내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진열장에는 제목이 적힌 카드들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날짜와 순서가 적힌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이름을 적는 칸은 없었다. 누군가의 사연을 기록하는 칸도 없었다. 제목과 날짜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장부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함께 살기 시작한 날」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멈췄다.
그날은 자신에게도 있었다. 좁은 빌라의 주방에 컵 두 개를 놓고, 냉장고에 장보기 목록을 붙이고, 짠 국을 먹으며 웃었던 날.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 장부에 적힌 날짜는 자신이 기억하는 날과 같았다.
하지만 제목 옆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녀는 장부를 덮었다. 누가 그 하루를 맡겼는지 알 수 없었다. 같은 날을 두 사람이 각자의 기억으로 맡겼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장부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제목을 더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맡기고 싶은 하루도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오래된 시집을 들고 제본소 문을 열었던 날. 그는 바카라을 새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고, 그녀는 고친 흔적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웃을 때 왼쪽 눈가에 주름이 먼저 잡혔다.
그날 이후 그가 제본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빵을 사 왔고, 난방기를 고쳤고, 자신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날은 그들의 생활이 시작된 날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삶이 처음으로 맞닿은 날이었다.
그녀는 그 기억을 맡기기로 했다.
며칠 동안 가게를 다시 찾지 않았다. 하루를 맡기는 것이 그를 잊기 위해서인지,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더는 견디지 못해서인지 스스로도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걸까 고민했다. 그가 받으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했다. 잘 지내느냐고 물을까. 보고 싶다고 말할까. 다시 돌아오라고 부탁할까.
결국 전화하지 않았다.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제본소에서 오래된 시집과 비슷한 바카라을 고치다가 그녀는 손을 멈췄다. 바카라등을 꿰는 실이 중간에서 끊어져 있었다. 그녀는 새 실을 바늘에 꿰고, 끊어진 자리를 천천히 이어 갔다.
바카라은 고쳐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처음과 같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가게를 다시 찾아갔다.
빈 카드 위에 제목을 적었다.
처음 만난 날.
가게 주인은 카드를 받아 장부에 날짜를 기록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하루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떠올렸다. 오래된 시집의 표지, 첫 장의 문장, 그가 바카라을 받아 들고 웃던 얼굴.
그 기억은 아직 선명했다.
그러나 카드를 건네고 나자, 기억은 손에서 빠져나간 물건처럼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날의 세부적인 장면을 붙잡으려 했지만, 더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와 처음 만난 날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었으나, 그날의 표정과 대화는 사라졌다.
그녀는 한동안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가게 주인은 진열장을 정리했다. 그녀가 빌릴 하루를 고를 수 있도록 카드들을 앞으로 밀어 두었다. 어느 카드도 특별히 권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목들을 하나씩 읽었다.
「비가 그친 오후」
「늦은 저녁의 산바카라」
「함께 살기 시작한 날」
그녀는 마지막 카드에서 눈을 멈췄다.
“이 하루를 빌리고 싶어요.”
가게 주인은 장부를 확인했다. 제목 아래에는 오래전에 맡겨진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는 카드의 뒷면을 살핀 뒤 그녀에게 건넸다. 특별히 고른 것도,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의 주인이 맡긴 하루가 장부에 남아 있었고, 그녀가 그 하루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카드에 적힌 제목을 다시 읽었다.
함께 살기 시작한 날.
그 하루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날과 같은 날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가게의 규칙은 분명했다. 빌린 하루는 실제로 다른 사람이 살아온 하루였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녀는 카드를 손에 쥐었다.
눈을 감기 전, 냉장고에 붙어 있던 메모가 잠깐 떠올랐다. 우유. 소금빵도. 글씨를 쓴 사람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도 한때 그런 메모가 있었다는 사실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날의 주인은 함께 살기 시작한 첫날을 다시 경험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뜬 그는 옆자리를 살폈다.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이불 끝에 걸려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잠시 멈췄다. 그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천천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방으로 가 커피를 내렸다. 컵 두 개를 꺼내 식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창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밤새 들어온 바람 때문인지 커튼 끝이 창틀에 걸려 있었다. 그는 커튼을 풀어 주고 창문을 손가락 두 마디만큼만 열어 두었다.
그녀가 방에서 나왔을 때, 커피는 조금 식어 있었다.
“먼저 일어났네요.”
“오늘은 일찍 깼어요.”
그녀는 자기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식었네.”
“새로 내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녀는 식탁에 앉아 어제 정리하던 바카라 목록을 펼쳤다. 그는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가 없었다.
“우유 떨어졌어요.”
“알아요. 어제 사려고 했는데 깜빡했어요.”
“제가 사 올게요.”
“소금빵도요.”
그가 웃었다.
“그건 안 잊어버릴게요.”
그는 메모지에 우유와 소금빵을 적었다. 글씨를 쓰다가 아래에 작은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그녀가 바카라을 읽거나 생각에 잠길 때 종이 가장자리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메모를 냉장고에 붙이고 외투를 입었다.
동네 마트에서 우유를 샀다. 빵집에서는 갓 구운 소금빵을 네 개 골랐다. 계산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휴대전화로 서울의 집을 검색했다. 출근할 회사에서 멀지 않은 방을 알아보고 있었지만, 아직 결정한 곳은 없었다.
화면을 끄자 빵집의 유리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 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바카라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우유를 냉장고에 넣고 소금빵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렸다.
“네 개나 샀어요?”
“오늘 먹고, 내일 먹고, 모레 먹으려고요.”
“모레면 서울에 있을 텐데요.”
그는 대답 대신 빵 봉투를 열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점심은 남은 반찬으로 먹었다. 그는 설거지를 했고, 그녀는 제본소에 가져갈 바카라과 도구를 정리했다. 그는 바카라 더미가 기울지 않도록 손으로 받쳐 주었다. 그녀가 작업 도구를 가방에 넣는 동안, 그는 바닥에 떨어진 실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오후에는 둘이 함께 동네를 걸었다.
늘 지나던 세탁소와 작은 마트, 오래된 문구점을 지났다. 특별히 갈 곳은 없었다. 그녀는 문구점 앞에서 새로 들어온 노트를 살펴보았고, 그는 옆에서 기다렸다. 그녀가 노트를 내려놓자 그가 물었다.
“살 줄 알았는데요.”
“집에 아직 안 쓴 게 많아요.”
“그럼 다음에 사요.”
“다음이 언제인데요?”
그는 대답하려다 웃었다.
“돌아오면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해가 기울 무렵 둘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제본소에 가져갈 도구를 다시 확인했고, 그는 서울에 가져갈 짐을 작은 가방 하나에 넣었다. 짐이 너무 적어 보여 그녀가 물었다.
“그게 다예요?”
“바카라은 회사에 많을 테니까요.”
“옷은요?”
“필요하면 사죠.”
“양말은요?”
그는 가방을 열어 양말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떠난다는 사실은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가방 하나에 들어가는 짐보다 그가 없는 집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일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저녁에는 함께 밥을 지었다. 그는 쌀을 너무 많이 씻었고, 그녀는 반찬을 만들다가 간을 잘못 맞췄다. 밥은 조금 질었고 국은 짰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아 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마친 뒤 그는 컵 두 개를 씻어 찬장에 넣었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내일 맡길 바카라의 목록을 정리했다. 그는 목록을 들여다보려다 그녀의 손에 가볍게 제지당했다.
“내 바카라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죠.”
“읽으려던 것뿐인데요.”
“읽는 것도 안 돼요.”
“그럼 평생 못 읽겠네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밤이 깊어지자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된 영화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내용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고,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서울에 가도 전화할게요.”
그가 말했다.
“알아요.”
“주말마다 내려올게요. 일이 많아도 가능한 한.”
“무리하지는 말고요.”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그는 깨우지 않았다. 화면 속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음악이 바뀌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아침에 마신 컵 두 개가 말라 있었다. 냉장고에는 우유와 소금빵을 적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날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였다.
하지만 그는 그 하루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그녀가 깨어나면 함께 침대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가 어깨에 기대어 있었고, 자신의 손은 그녀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 하루가 자신에게서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날 밤에는 그랬다.
그녀는 눈을 떴다.
가게 안이었다. 손에는 카드가 들려 있었다. 카드에 적힌 제목은 「함께 살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카드의 제목을 읽었다.
함께 살기 시작한 날.
그 순간, 빌린 하루 속에서 보았던 두 개의 컵이 떠올랐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메모와 소금빵이 담긴 종이봉투, 잠든 자신을 깨우지 않으려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던 사람.
자신이 기억하는 바로 그날이었다.
그녀는 그날의 장면들을 경험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익숙한 방의 빛과 손에 닿던 컵의 감촉,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 그날을 자신의 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잠든 뒤에도 깨우지 못하고, 평범한 하루가 끝나는 것을 아쉬워할 만큼. 자신에게는 그저 함께 보낸 하루였던 시간이 그에게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그녀는 카드의 뒷면을 뒤집었다. 날짜는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한 날과 같았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더는 누구의 하루인지 알 수 없다는 말로 외면할 수 없었다.
그가 왜 그 하루를 맡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마다 그가 얼마나 깊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했던 하루를 다시 살아 보는 동안,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을 전해 줄 사람은 곁에 없었다.
“그 사람은 이 하루를 기억하지 못하겠네요.”
가게 주인은 안내문을 정리했다. 그 문장에 대한 답은 이미 벽에 적혀 있었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냉장고에서 메모를 떼어 냈다. 종이 뒷면에는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 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유.
소금빵도.
그녀는 글씨를 오래 바라보았다. 자신이 쓴 글씨인지, 다른 사람이 쓴 글씨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메모가 오래전부터 냉장고에 붙어 있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메모를 버리지 않고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유를 사러 나갔다.
그녀는 다시 가게를 찾아가지 않았다.
빌린 하루를 돌려주면 자신이 맡긴 하루를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가장 소중한 하루를 대가로 내야 했다. 그 대가로 내놓은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하루를 되찾고 싶었다. 그날의 표정과 목소리, 두 사람이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하루를 되찾기 위해 또 다른 하루를 영원히 잃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하루를 대가로 내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를 처음 만난 날, 함께 살기 시작한 날, 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저녁을 먹었던 날. 어느 하나를 가장 소중하다고 고르는 순간, 나머지 하루들이 덜 소중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선택을 미뤘다.
가게에 가지 않는 동안에도 생활은 계속되었다. 제본소의 주문은 늘었고, 고장 난 난방기는 새것으로 바뀌었다. 냉장고에는 혼자 먹을 음식이 들어갔고, 식탁에는 컵 하나만 놓였다.
그녀는 더 이상 빈자리를 매일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그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때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그녀는 냉장고에서 오래된 메모를 꺼냈다.
우유.
소금빵도.
그녀는 글씨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종이는 조금 낡아 있었고, 접힌 자리에 희미한 선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메모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제본소 문을 열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바람이 들어오자 작업대 위의 얇은 종이가 살짝 들렸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종이를 눌러 놓고, 바늘에 실을 꿰었다.
바카라등의 끊어진 실을 찾아 천천히 이어 갔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하루를 살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