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싶은 건지, 뺏기기 싫은 건지
집을 다 보고 나오자 은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나는 108동 매물이 괜찮더라. 수리할 곳도 없고 세입자랑 이사 날짜 맞출 필요도 없잖아.”
민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110동 집이 더 좋긴 했다. 학교 쪽으로 시야가 트였고, 같은 평형인데도 거실에서 느껴지는 개방감이 달랐다. 다만 세입자가 살고 있어 입주 시기를 맞춰야 했고, 손볼 곳도 몇 군데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남의 살림이 놓인 집은 제대로 본 것 같지가 않았다.
유진의 집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 그랬다.
“나도 108동이 낫긴 해.”
“그치?”
은서는 기다렸다는 듯 화면을 보여줬다. 두 집의 조건을 메모해놓고 있었다.
108동 1303호는 8억 2천. 중층. 남향. 집 상태 양호. 바로 입주 가능.
110동 1601호는 8억. 고층. 학교 앞. 세입자 거주. 부분 수리 필요.
“오빠, 이천 차이면 그냥 108동 가는 게 낫지 않아?”
“이천이면 꽤나 부담되는데.”
“수리하고 입주 날짜 맞추고 그러면 비용 꽤나 나갈 것 같은데.”
“이천 만원이 옆집 개 이름이야?”
은서는 더 설득하지 않았다.
둘은 중개사무소로 돌아왔다.
중개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세요?”
“108동 매물이요.”
은서가 먼저 말했다.
민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108동이 좋긴 한데, 가격이 좀 세서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8억 1천까지는 한번 해본다고.”
“8억은 안 될까요?”
“8억은 집주인이 안 팔려고 해요.”
중개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번에도 8억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안 팔았어요.”
민재가 물었다.
“언제요?”
“얼마 안 됐어요. 한 달도 안 됐나.”
“근데 아직 안 팔렸네요.”
“그때는 집주인이 8억 3천 불렀어요. 지금 낮춘 거고.”
은서가 옆에서 민재를 한번 봤다.
민재는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중개사가 매도인에게 전화를 걸어보겠다며 자리를 비켰다.
그 사이 은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8억 1천까지는 괜찮지?”
“괜찮기는 하지.”
“나는 이 정도면 사고 싶어.”
민재는 테이블 위 계산기를 끌어왔다.
보유 현금에서 계약금과 중도금을 빼고, 양가에서 받기로 한 돈을 더했다. 대출은 최대치가 아니라 둘이 미리 정해둔 선까지만 넣었다.
이미 여러 번 해본 계산이라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8억 1천도 살 수 있었다.
취득세와 중개보수, 이사비용까지 감안해도 아주 빠듯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8억 1천에 사면 가전까지 하고 현금 얼마나 남지?”
은서가 물었다.
“가전을 얼마짜리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우리가 지난번에 베스트샵에서 본 정도.”
민재가 대충 계산해봤다.
“삼천 좀 넘네.”
“그 정도면 되지 않아?”
“나는 사천은 남겼으면 좋겠는데.”
“그럼 집값을 더 내려야지.”
“그러니까.”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민재는 조금 의외였다. 은서가 이 집을 제일 좋아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자고 할 줄 알았다.
“8억 1천 안 된다고 하면?”
민재가 물었다.
“다른 데 봐야지.”
“여기 제일 마음에 든다며.”
“제일 마음에 드는 거랑 사는 건 다르지.”
은서는 휴대전화로 다른 매물을 보고 있었다.
“8억 2천에 사서 돈 거의 안 남기는 것보다는 조금 덜 마음에 들어도 싼 데 가는 게 낫지 않아?”
민재는 아까까지만 해도 같은 생각이었다.
8억이 넘어가는 순간 돈의 단위가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준신축 아파트 한 채에 그만한 돈을 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은서가 별 미련 없이 다른 매물을 넘겨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천 차이잖아.”
은서가 화면에서 눈을 들어 물었다.
“뭐가?”
“8억 천이랑 8억 2천.”
“아까는 이천도 그냥 이천이 아니라며.”
민재는 웃었다.
“아니, 그렇다는 거지.”
마침 중개사가 돌아왔다.
“8억 천까지는 된대요.”
은서가 바로 민재를 쳐다봤다.
중개사는 의자에 앉으며 덧붙였다.
“대신 계약을 빨리 했으면 한대요. 집주인이 이번 주 안에는 결정을 하고 싶나 봐요.”
민재가 물었다.
“생각할 시간은 좀 있죠?”
“그럼요. 그런데 제가 다른 분들께 매물을 안 보여줄 수는 없어요.”
“저희 말고 매수하려는 사람이 또 있어요?”
중개사가 잠깐 머뭇거렸다.
“오늘 저녁에 한 팀 보러온대요.”
은서가 물었다.
“언제 연락을 받으셨어요?”
“아까 오전에 연락 왔어요. 같은 집 보겠다고.”
민재는 중개사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생각했다.
부동산에서 흔히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다른 손님이 있어서 곧 계약될 것 같다. 지금 결정하셔야 한다.
집을 보러 다니는 두 달 동안 몇 번이나 들었다.
그때마다 민재는 은서에게 같은 말을 했다.
급하게 살 필요 없어. 매물은 또 나와.
오늘도 그렇게 말하면 됐다.
은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잠깐 상의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중개사도 붙잡지 않았다.
“그러세요. 큰돈 쓰는 건데 보고 하셔야죠.”
밖으로 나오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둘은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은서가 말했다.
“밥 먹고 다른 단지도 하나 볼래?”
“어디?”
“지난주에 봤던 데. 거기 7억 7천짜리 새로 올라왔어.”
“거긴 출근하기 멀잖아.”
“당신은 십 분 정도 더 걸리고, 나는 비슷해.”
“연식도 더 오래됐고.”
“칠 년 차이면 오래된 건 아니지.”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에 타기 전 다시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108동은 주차장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조금 전 봤던 집 거실 창도 어딘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세어보지는 않았다.
“여기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
은서가 물었다.
“그걸 알면 진작에 결정했지.”
“나는 조금 아쉽기는 해도 후회까진 안 할 것 같아.”
민재가 차 문을 열다가 멈췄다.
“왜?”
“집이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은서는 조수석에 타면서 안전벨트를 맸다.
“나는 우리가 정해놓은 기준대로 사고 싶어. 결혼 시작하면서 현금 하나도 안 남기고 집에 다 넣는 건 싫어.”
“나도 그래.”
민재가 시동을 걸었다.
“8억 1천 된다잖아. 고민해보자는 거지.”
차를 빼려고 후진 기어를 넣었을 때였다.
중개사무소 앞에 승용차 한 대가 섰다.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리고 조수석에서는 여자가 내렸다. 둘 다 민재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남자는 중개사무소 유리창에 붙은 매물을 훑어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그 뒤를 따라갔다.
민재는 후진하다 말고 그쪽을 봤다.
“왜 안 가?”
은서가 물었다.
“가.”
민재는 차를 뺐다.
단지를 빠져나와 큰길에 접어들 때까지 별말이 없었다.
신호에 걸리자 은서가 아까 말한 7억 7천짜리 매물 사진을 보여줬다.
“이거 봐봐. 내부는 여기가 더 깔끔해.”
민재는 화면을 한번 보고 다시 앞을 봤다.
“동향이잖아.”
“남동향이야.”
“앞에 동도 있고.”
“그래도 그것보다 사천 싸잖아.”
민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를 출발시키는데 중개사에게 문자가 왔다.
민재는 운전 중이라 은서가 대신 읽었다.
“아까 말씀드린 108동 매물, 저녁 손님도 보고 결정하신다고 합니다. 매도인 8억 1천까지 확인했습니다.”
은서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그냥 가자.”
“왜?”
“집 하나 때문에 이러다 급하게 결정하겠다.”
민재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집에 돌아가서 자금 계획을 다시 보고, 비슷한 매물도 더 찾아본 뒤 결정하면 됐다.
길어야 하루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샤워까지 마친 뒤에도 민재는 아까 본 집을 계속 찾아보고 있었다.
같은 단지의 최근 실거래를 다시 확인했고, 108동에서 지난 몇 달 동안 거래된 물건도 봤다. 호가가 8억 2천인 다른 매물을 눌렀다가 8억 4천짜리를 보고, 다시 8억 1천짜리로 돌아왔다.
그러다 110동 매물도 한번 찾아봤다.
유진이 사는 집과 같은 동이었다.
민재는 검색창에 단지 이름을 넣고 ‘월세’ 탭을 눌렀다.
84㎡ 월세 매물이 몇 개 나왔다.
보증금 5천에 230.
보증금 1억에 200.
보증금 3천에 250.
민재는 별 뜻 없이 계산기를 켰다.
연 2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월세를 저렇게 내느니 사는 게 낫지 않나.’
그 생각이 들었다.
곧 자기 자신이 우스워졌다.
유진이 실제로 얼마를 내는지도 모르고, 저 집에서 왜 월세를 사는지도 몰랐다. 중개사는 어차피 자기 집에 들어갈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가’가 어디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민재는 부동산 앱을 닫았다.
잠시 뒤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108동 매물을 눌렀다.
아까 보러 온 부부가 계약하면 이 매물은 사라진다.
생각해보니 그게 싫었다.
집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남이 가져가는 게 싫어서인지는 민재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어 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자?
잠시 뒤 답이 왔다.
— 아직.
— 내일 아침에 부동산 다시 가볼까?
한참 후에 은서가 답했다.
— 계약하려고?
민재는 바로 쓰지 않았다.
휴대전화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 가격 한 번만 더 얘기해보게.
은서가 보낸 답은 짧았다.
— 8억 천 넘으면 안 사는 거다.
민재는 그 메시지를 한동안 보고 있었다.
그러다 키보드를 열었다.
— 알았어.
전송한 뒤 다시 부동산 앱으로 돌아갔다.
108동 84㎡.
매매 8억 2,000.
민재는 화면을 끄지 않은 채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