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사는 집
중개사가 앞장서고 민재와 은서가 뒤를 따랐다.
108동까지는 사무실에서 걸어서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단지 안쪽으로 들어오자 도로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고, 중앙광장을 지나면서부터는 아이들 목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은서는 걸어가는 내내 주변을 살폈다. 어린이집 간판을 확인하고, 지하주차장 입구가 어디로 나 있는지 보고, 어느 동 앞에 쓰레기장이 있는지도 물었다.
“분리수거는 요일 정해져 있어요?”
“동마다 조금씩 달라요. 여기 108동은 수요일, 일요일.”
“음식물은요?”
“그건 상시고.”
민재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걷다가 110동 쪽을 한번 바라봤다.
아까 유진과 그 남자가 정말 저쪽에서 나온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반가움보다 당황스러움이 먼저였고, 지나친 뒤에는 괜히 뒤를 돌아보기가 싫었다. 버스정류장 유리에 비친 두 사람을 훔쳐본 것도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소개팅으로 두 번 만난 사람이었다.
번호도 진작 지웠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조차 조금 뜻밖이었다.
중개사가 공동현관 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여기가 위치는 참 좋아요. 같은 단지 안에서도 이쪽 라인이 조용해서 애 키우는 집들이 좋아해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은서가 민재에게 낮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 학교 사람이야?”
“아니. 옛날에 소개팅 한번.”
은서가 그제야 민재를 쳐다봤다.
“소개팅?”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만났나.”
“그걸 왜 이제 말해?”
민재는 대답 대신 층수 표시를 봤다.
엘리베이터가 8층을 지나고 있었다.
“왜 아는 척 안 했어?”
“애매하잖아. 3년 전에 두 번 만난 사람한테 갑자기 가서 반갑다고 하기도 그렇고.”
은서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더 묻지는 않았다.
민재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은서가 질투라도 했으면 설명할 거리가 있었을 텐데, 소개팅으로 두 번 만난 여자라는 말을 듣고 금방 관심을 잃어버렸다.
중개사가 현관문을 열었다.
“집 비어 있으니까 편하게 보세요.”
집은 사진보다 넓어 보였다.
거실과 주방이 일자로 이어져 있었고, 베란다를 확장해서 거실 창이 컸다. 오후 햇빛이 마루 절반까지 들어와 있었다.
은서는 신발을 벗자마자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장 이거 그대로 주는 거예요?”
“네. 붙박이는 전부 포함이에요.”
“식기세척기도요?”
“그건 매도인하고 협의해 봐야 되고.”
민재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시스템에어컨이 달려 있었다.
벽지는 깨끗했고 마루에도 눈에 띄는 흠집이 없었다. 인테리어를 새로 하지 않아도 당장 들어와 살 만했다.
“왜 파는 거예요?”
민재가 물었다.
“집주인이 서울로 가요. 온라인 게임 때문에.”
“여기 실거주였어요?”
“네. 한 오 년 살았나.”
중개사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여기서 보시면 앞이 막히는 게 없어서 좋아요.”
민재도 창가로 갔다.
단지 맞은편으로 학교 운동장이 보였고 그 너머에 낮은 상가 건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은서는 휴대전화로 방향을 확인했다.
“남향 맞죠?”
“남남동이에요.”
“겨울에는 해 잘 들어오겠다.”
중개사가 웃었다.
“그래서 이 집이 가격이 좀 있는 거예요.”
민재는 유리창 너머로 단지를 내려다봤다.
조금 전 걸었던 길이 보였다. 110동은 오른쪽에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8억 2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하나에 이만큼의 돈을 쓴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자기 돈과 은서의 돈을 합치고 대출까지 받으면 살 수는 있었지만, 살 수 있다는 것과 사고 싶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막상 집 안에 들어오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은서가 안방에서 불렀다.
“여기 와봐.”
드레스룸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생각보다 넓어. 화장대도 들어가겠다.”
“너 화장대 안 쓰잖아.”
“그러니까 당신 쓰라고.”
“내가 화장대를 왜 써.”
“남자는 템빨이야.”
민재가 피식 웃었다.
“듀얼 모니터랑 본체는 작은 방에 넣어야지.”
“컴퓨터를 왜 신혼집에 두는데?”
“원래 있던 걸 버리냐?”
“난 당신 결혼하면 좀 줄일 줄 알았는데.”
“뭘?”
“맨날 장 열어놓고 쳐다보는 거.”
최근에는 크게 사고팔지도 않았다. 결혼 준비가 시작된 뒤로는 가지고 있던 종목을 대부분 정리했고, 계좌에 남은 돈도 많지 않았다. 집 계약이 끝나면 여윳돈이 더 줄 테니 당분간 주식에 신경 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작은방 두 개까지 둘러본 뒤 은서가 다시 거실에 섰다.
“나는 좋은데.”
중개사가 바로 받아 말했다.
“이 가격이면 괜찮아요. 집 상태가 좋아서 손볼 데도 없고. 사실 8억 1천까지는 한번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재가 물었다.
“8억 밑으로는 힘들죠?”
“그건 어렵죠.”
“7억 9천 정도면 바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중개사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요즘 같은 평형 실거래 보셨잖아요. 그 가격에는 집주인이 안 팔아요.”
민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집을 나오면서 은서가 물었다.
“어때?”
“괜찮긴 한데.”
“근데?”
“비싸.”
“그 얘기는 여기 오기 전부터 했잖아.”
“집이 좋다고 가격이 안 비싼 건 아니니까.”
“그건 맞지.”
둘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은서는 휴대전화에 뭔가를 적었다.
민재가 슬쩍 보니 ‘108동 8.2 / 상태 좋음 / 남향 / 인테리어 X’라고 쓰여 있었다.
“몇 점?”
민재가 물었다.
“팔십오 점.”
“높네.”
“지금까지 본 데 중에는 제일 좋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집을 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은 맞았지만, 지금 바로 계약하자는 생각까지 든 것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중개사가 말했다.
“시간 괜찮으시면 하나 더 보실래요?”
은서가 바로 물었다.
“같은 평형이에요?”
“네. 110동에도 하나 있어요. 거기는 급매라 가격은 더 싸요.”
민재가 쳐다봤다.
“아까 로열동이라고 한 데?”
은서가 묻자 중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108동 보다 비싼 동인데, 지금 세입자가 있어서 싸게 나온 거예요.”
민재는 말없이 중개사를 따라 걸었다.
110동으로 가까워질수록 아까 횡단보도에서 본 장면이 또 떠올랐다. 유진이 어느 방향에서 나왔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았지만, 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동 출입구 주변을 살폈다.
자전거 몇 대가 세워져 있었고, 화단 옆에는 택배 상자가 쌓여 있었다.
중개사가 공동현관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여기는 사람이 살고 있어서 연락 한번 할게요.”
통화 연결음이 두어 번 울렸다.
“여보세요. 사모님, 저 부동산인데요. 아까 말씀드렸던 손님 지금 올라가도 될까요?”
잠시 상대방 말을 듣더니 중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밖에 계세요? 네. 그럼 비밀번호로 들어갈게요. 집은 정리해 놓으셨죠?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은서에게 말했다.
“세입자분들이 외출했대요. 편하게 볼 수 있겠네.”
민재가 물었다.
“월세예요?”
“네.”
“전세 아니고요?”
“월세예요. 요즘 이 동 월세가 잘 나가요.”
민재는 조금 전에 사무실에서 들었던 보증금과 월세를 떠올렸다.
“얼마 정도인데요?”
“여긴 보증금 5천에 이백사십인가 그럴 거예요.”
은서가 놀랐다.
“월세가 이백사십이나 해요?”
“이 동이 비싸요. 학군 때문에 들어오는 집도 있고, 근처 새 아파트 입주 기다리면서 잠깐 사는 집도 있고.”
현관문이 열렸다.
누군가 사는 집에 들어갈 때 특유의 냄새가 났다. 섬유유연제 냄새와 음식 냄새가 조금씩 섞여 있었다.
민재는 고개를 숙여 신발을 벗다가 현관 한쪽에 놓인 운동화를 봤다.
검은색 남자 운동화와 흰색 여자 운동화.
그 옆에는 갈색 로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디서 본 신발은 아니었다.
그럴 리도 없었다.
민재는 괜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마.’
혼자 속으로 말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이 집은 조금 전 본 집보다 생활감이 훨씬 강했다.
소파 위에 담요가 놓여 있었고, 식탁에는 컵 두 개가 엎어져 있었다. 냉장고 옆에는 장을 보고 받은 듯한 영수증 하나가 자석에 붙어 있었다.
민재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영수증 맨 위를 봤다.
단지 앞 마트 이름이었다.
별것도 아니었다.
은서는 베란다 쪽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긴 뷰가 더 좋네.”
중개사가 말했다.
“그러니까 로열동이지.”
민재는 거실 끝에 서 있었다.
TV장 옆에 작은 액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액자 안에는 바닷가에서 찍은 부부 사진이 들어 있었다.
민재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진이었다.
옆에 있는 남자는 아까 횡단보도에서 본 남자였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알아보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민재는 액자 앞으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사진을 본 티를 내지 않은 채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은서가 수납장을 열어보며 말했다.
“여기도 구조는 똑같네.”
“그러네.”
민재가 대답했다.
중개사가 안방 쪽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 세입자분들도 오래 안 살았어요. 한 이 년 됐나.”
민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계약 끝나면 나가는 거예요?”
“네. 집주인이 팔 거라서.”
중개사는 방문을 열어보며 별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이 집 세입자분들은 어차피 자기 집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없어요.”
민재가 잠깐 멈췄다.
“자기 집이요?”
중개사는 이미 다른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네. 여기 잠깐 월세로 살던 거예요.”
민재는 뒤따라가려다가 거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
액자 속 유진은 모자를 쓴 남자와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월세.
그 단어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