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알고 나면 궁금증은 끝날 것 같았다. 예전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생각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알아보고, 알게 되면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답을 얻은 뒤에도 발걸음이 멈추는 때가 생겼다. 답을 얻었다고 해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이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를 알고 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며칠 전 길을 걷다가 오래된 건물 앞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외벽은 여러 번 손을 본 흔적이 있었고 창틀도 새것과 오래된 것이 섞여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물은 아니었는데 1층 출입문 옆에 손잡이가 두 개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일반적인 높이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눈에 띄게 낮았다. 처음에는 잘못 설치한 것처럼 보였지만 몇 걸음 지나친 뒤 다시 돌아가 문을 살펴보았다. 손잡이의 높이를 가늠하고 문이 열리는 방향을 보면서 주변까지 눈을 돌리자 문 앞 바닥이 다른 곳보다 유난히 닳아 있었다.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발을 멈추고 몸의 방향을 바꾸면서 생긴 흔적처럼 보였다.
손잡이 하나만 보고 있을 때와 그 문을 사용하는 사람의 움직임까지 함께 생각했을 때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손잡이가 왜 두 개 달려 있는지 정확한 이유를 그 자리에서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건물의 용도나 설계 의도를 찾아보면 다른 설명이 나올 수도 있다. 그래도 그날은 검색부터 하지 않았다. 손잡이의 이유를 빨리 알아내는 것보다 먼저 내가 눈앞에서 발견한 것을 충분히 바라보고 싶었다.
나는 예전부터 공간을 그렇게 바라보는 편이었다. 도면에서는 문 하나가 문 하나일 뿐이고, 폭과 높이와 손잡이의 위치는 숫자로 표시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 서면 숫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움직임이 보인다. 문 앞에서 한 번 멈추는 사람도 있고, 손잡이를 잡은 뒤 몸을 틀어 들어가는 사람도 있으며, 뒤에서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잠시 잡아주는 사람도 있다. 안쪽에서 나오는 사람과 마주치면 누군가는 한쪽으로 몸을 비켜선다. 공간은 벽과 문과 가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식당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입구에서 몇 걸음 들어가면 빈자리가 바로 보이는데도 손님들은 그 자리에 앉지 않고 안쪽까지 걸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입구 가까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지켜보니 이유가 보였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사이로 직원들이 음식을 나르고 있었고, 입구 가까운 빈자리에 앉으면 직원들의 동선을 자주 마주치게 되는 구조였다. 손님들은 빈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편한 자리를 고르고 있었던 셈이다. 빈자리가 있다는 것과 앉기 좋은 자리가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그 뒤로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갈 때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게 됐다. 어느 자리에 먼저 앉는지, 어떤 통로를 피하는지, 사람들이 어디에서 잠시 멈추는지를 보고 나면 공간을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졌다. 설계도면의 치수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도면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 실제로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디에서 불편을 느끼고 어떤 곳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지는 현장에 서서 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일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됐다.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면서 익숙하게 사용하던 말 하나를 다시 생각하게 된 적이 있다. 장애인을 예전처럼 ‘장애자’라고 부르던 표현이었다. 법률적인 용어의 문제를 떠나 우리 슬롯에는 오래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말들이 있다. 관습과 관행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이지만,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한 가지 특성으로만 규정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부터 말도 공간이나 사물처럼 한 번 더 살펴보게 됐다. 익숙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괜찮은지, 내가 편하게 생각하는 표현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정해진 답을 하나 더 갖는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당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까지 다시 들여다보는 일도 앎의 일부였다.
그래서 나는 노인이 되기 전에 요양보호사 공부를 한번 해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자격증을 따서 일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내게 그 공부는 준비된 노년생활을 위한 공부에 가깝다. 나이가 들면 몸의 움직임이 달라지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조금씩 줄어든다. 부모를 돌보는 입장이 될 수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맞이하기 전까지 우리는 노인의 몸과 생활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제대로 배울 기회가 많지 않다.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면서 걷고 일어나고 먹고 씻고 옷을 입는 것처럼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동작도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데 큰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의 몸이 달라지면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같은 말이라도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도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예전에는 사물의 모양과 공간의 구조를 궁금해했다면 이제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몸과 생활까지 함께 바라보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오래 품어온 호기심도 조금씩 모양이 달라져 왔다. 어린 시절에는 개미가 어디로 가는지, 나무뿌리가 왜 땅 위로 드러나는지, 비가 그친 뒤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가 궁금했다. 바카라을 읽으면서는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를 배웠고, 공간을 설계하면서는 사람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살펴보게 됐다. 이제는 익숙한 말 하나를 사용할 때도 잠시 멈춰 그 말이 누구에게 어떻게 들릴지를 생각한다.
예전에는 답을 알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답을 얻은 뒤에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문손잡이 하나를 보고도 그렇고, 사람이 오가는 공간을 볼 때도 그렇고, 익숙한 말을 들을 때도 그렇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다시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날 오래된 건물 앞에서 손잡이를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던 것처럼, 나는 이제 답을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전부인지,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한 번 더 바라본다.
호기심은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알아낸 뒤에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