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 때와 그냥 지나가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그것을 잘 몰랐다. 누군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면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고, 가까운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내가 아는 방법을 먼저 이야기했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가족에게는 더 그랬다.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상대의 행동을 쉽게 고치려 했다. 아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으면 나는 기다리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밥 좀 빨리 먹어요.” “그것만 하고 가자.” “시간 없어.” 지금 생각하면 그 말들은 대부분 서두르자는 뜻이었다. 나는 시간을 아끼려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하던 일을 재촉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집안일을 함께하다 보니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했던 말이 내게 돌아오는 순간도 생겼다.
음식을 냄비에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깜빡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잠깐이면 되겠지 하고 자리를 비웠다가 한참 뒤 주방에 들어가면 냄비에서 탄 냄새가 올라왔다. 뚜껑을 열어보면 음식은 이미 바닥에 눌어붙어 있었고, 냄비를 씻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더 곤란한 것은 냄새였다. 한번 음식이 타고나면 주방만의 일이 아니었다. 집 전체에 탄 냄새가 퍼졌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도 쉽게 빠지지 않았고, 공기청정기를 돌리고 커피를 내려 향을 바꿔보아도 이미 배어버린 냄새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웠다. 한동안 집 안을 움직일 때마다 어디선가 탄 냄새가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지금은 인덕션을 사용한다. 음식이나 물을 올려놓을 때 타이머를 맞춰둔다. 시간을 정해두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알림이 울린다. 예전처럼 잠깐 다른 일을 하다가 냄비를 태울 일이 훨씬 줄었다. 기술이 생활의 작은 실수를 대신 막아주는 셈이다.
그런데 가끔 타이머를 맞추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나도 잠깐 멈칫한다.
‘내가 벌써 이런 걸 깜빡하나.’
나이가 들면서 깜빡하는 일이 생기면 혹시 내가 예전과 달라진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젊었을 때도 한눈을 팔다 냄비를 태린 적은 있었다. 그때는 그런 일을 나이와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으로 잊을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깜빡했다는 사실보다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같은 일을 줄일 방법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덕션의 타이머도 그런 생각에서 보면 작은 장치 하나가 생활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예전처럼 누군가가 무언가를 잊었을 때 바로 “왜 그것도 못 기억해?”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이 상대에게는 얼마나 날카롭게 들렸을지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잠깐 다른 것을 잊을 수 있고, 그 순간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공간을 설계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어디로 들어오는지, 어느 곳에서 멈추는지, 어떤 길을 피해 가는지부터 본다. 의자에 앉았다가 금방 일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의자의 높이나 깊이를 살펴보고, 좁은 곳에서 사람들이 계속 몸을 옆으로 돌리면 통로 폭을 다시 잰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움직일까 가 궁금했지만, 여러 번 보다 보니 사람에게 먼저 묻기보다 공간을 다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사람이 의자에 오래 앉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불편한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의자가 너무 높을 수도 있고, 뒤에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신경이 쓰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설계자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의 사적인 사정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실제로 불편한 일이 생기고 있는지일 때가 많았다.
딸이 성인이 된 뒤에도 나는 한동안 부모의 방식으로 딸의 생활을 바라봤다. 통금시간을 정해두었고, 늦어질 것 같으면 미리 내게 동의를 구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늦은 시간까지 밖에 있으면 걱정이 됐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내가 정한 시간을 지키는 것이 딸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한동안 그 통금시간을 그대로 두었다. 어느 날 딸이 친구들은 밤늦게까지 놀기도 하는데 자신은 아버지가 정해놓은 시간 때문에 데이트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딸을 몇 살짜리로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됐다.
대학을 졸업한 성인이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에게 하듯 시간을 정하고, 늦어지면 허락을 받도록 했다. 내게는 보호였지만 딸에게는 통제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정해주어야 할 것이 많다. 위험한 곳에 가지 않도록 살피고, 돌아올 시간을 알려주는 것도 부모의 몫이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걱정한다고 해서 계속 시간을 정해줄 수는 없고, 부모가 알고 싶다고 해서 자녀의 모든 일정을 확인할 수도 없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시간을 사용할 권리도 함께 갖는다는 뜻일 텐데, 부모인 나는 그 경계를 쉽게 놓지 못했다. 아이가 자라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관심과 참견은 한 끗 차이였다.
나는 딸을 걱정해서 통금시간을 정했다고 생각했지만 딸이 받아들이는 모습은 달랐다. 내가 안전을 생각해 정한 시간이 딸에게는 자신의 생활을 제한하는 규칙으로 느껴졌다. 같은 행동을 두고 아버지가 느끼는 것과 딸이 느끼는 것이 달랐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관심을 내 중심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이 말만 붙잡고 있으면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함께 봐야 했다.
내 중심에서 너의 중심으로 시선을 옮겨보는 것. 말로는 간단하지만 가족 사이에서는 쉽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거공간을 설계할 때도 그래서 먼저 생활을 듣는다. 아침에 어디에서 하루를 시작하는지,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가족이 언제 모이는지, 물건을 어디에 두고 쓰는지를 살핀다. 집을 함께 짓는 가족이라고 해도 원하는 것이 모두 같지는 않다. 누군가는 손님에게 보여주기 좋은 집을 원하고, 누군가는 남에게 보여줄 필요 없이 자기 가족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원한다. 아내가 주로 사용하는 주방이나 수납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가족은 자기 방이나 거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설계자가 자기 기준으로 어느 하나를 정해버리면 실제로 살아갈 사람의 생활은 빠져나갈 곳이 없어진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다른 요구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살핀다.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보는 것이다.
딸의 통금 문제를 돌아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는 사람의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내가 정한 시간이 당연해 보였다. 딸의 자리에서 생각해 보면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아버지에게 외출 시간을 허락받아야 하는 일이 답답할 수 있었다.
부모라는 이유로 자녀의 삶을 대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보호를 위해 부모가 정해주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인이 된 뒤에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줘야 한다.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늦은 시간까지 연락이 없으면 여전히 마음이 쓰인다. 부모라는 자리는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걱정되는 마음과 상대의 생활을 통제하는 일은 구분해야 했다.
길을 걷다가 오래된 집을 만나면 나는 안쪽이 궁금하다. 창문이 왜 저 자리에 있는지, 대문은 어느 쪽으로 열렸을지, 벽에 남은 흔적은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 담장 밖에서 볼 수 있는 것까지만 보고 지나간다.
사람에게도 그런 경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상대의 시간을 정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말하지 않은 것을 알아내려고 하기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두는 것도 관계의 한 부분이었다.
관심과 참견의 차이는 거창한 데서 생기지 않는다. 내가 걱정하는 마음만 바라보면 관심이지만, 그 말과 행동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까지 생각하면 내가 하려는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냄비를 태우고 나서 인덕션 타이머를 맞추는 것처럼, 나에게도 생활의 작은 장치를 하나 마련한 셈이다.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잠깐 멈추는 것. 내가 지금 상대를 위해 말하는지, 아니면 내가 안심하고 싶어서 말하는지 한 번 더 살펴보는 것이다.
딸에게 통금시간을 정해두었던 일을 돌아보면 두 마음이 함께 있었다. 걱정도 있었고, 내가 정한 범위 안에 있으면 안심할 수 있다는 마음도 있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오래 품고 있다 보면 그 경계를 놓치기 쉽다. 아이가 자라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보인다. 그래서 성인이 된 자녀에게도 어린 시절의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관심은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함께 보는 데서 시작한다.
내 중심에서 너의 중심으로 시선을 옮겨보는 것.
그렇게 자리를 바꾸어 바라보면,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린다.
딸의 볼멘소리를 들었던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