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보고서가 한 장이었다. 문제가 생기자 확인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다른 사고가 생기자 결재단계를 하나 늘렸다. 정보 공유가 부족하다며 정기회의를 만들었다. 회의가 길어진다고 회의자료 양식을 만들었다. 몇 년이 지나자 어느 것 하나 이유 없이 생긴 것은 없었다. 문제는 없어진 것도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기존 업무에 하나를 더 얹었다.
리더가 어느 날 직원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바쁩니까?”
직원이 웃으며 대답한다.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날 리더는 질문을 바꾸어본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됩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진다. 새로운 일을 제안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하지 않을 일을 정해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도덕경』 제48장은 ‘더하는 공부’와 ‘덜어내는 도’를 대비한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위학일익, 위도일손)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더해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진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덜고 또 덜어 마침내 무위에 이른다.
앞의 12장에서 우리는 이 구절을 리더가 자신의 개입을 덜어내는 문제로 읽었다. 여기에서는 같은 문장을 다른 방향에서 읽어보려 한다. 이번에 덜어낼 것은 리더의 개입만이 아니다. 조직에 오랜 세월 쌓여온 일, 제도, 절차, 회의, 보고, 사업의 무게다. 같은 노자의 문장이지만 질문은 달라진다.
“우리 조직은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이제 무엇을 그만해야 하는가?”
조직에는 시작하는 사람보다 끝내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박수를 받는다. 신사업을 시작했다. 새 제도를 만들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성과가 눈에 보인다. 그러나 오래된 회의를 없앤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조직은 드물다. 필요 없는 보고서를 폐지하고, 효과 없는 사업을 중단하고, 복잡한 절차를 간단하게 만드는 일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조직이 오래될수록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끝낼 수 있는 사람. 시작에는 추진력이 필요하지만 끝내는 데에는 판단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일에는 처음의 이유가 있었다 오래된 제도를 보면 쉽게 말할 수 있다.
“이걸 왜 하고 있지?”
그러나 처음에는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고가 나서 만든 규정, 고객의 요구 때문에 시작한 보고, 특정 사업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회의.
문제는 환경이 달라졌는데 제도만 살아남는 것이다. 사람은 바뀌고, 기술은 달라지고, 사업은 끝났는데, 보고서는 계속 작성된다. 그때 조직에는 일이 아니라 일의 흔적이 쌓인다. 그래서 리더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 때만 질문할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제도에도 물어야 한다.
“이 일을 시작하게 만든 이유가 지금도 존재하는가?”
이유가 사라졌다면 그 일의 수명도 다시 검토해야 한다.
덜어내는 것은 사람의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다
회의 하나를 없앤다고 생각해 보자. 10명이 매주 한 시간 참석했다면 한 달이면 적지 않은 시간이 된다. 보고서 하나를 없애도 마찬가지다. 작성하는 사람, 검토하는 사람, 결재하는 사람의 시간이 돌아온다. 그 시간은 어디로 갈까. 고객에게 갈 수도 있고, 현장으로 갈 수도 있고,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때로는 조금 일찍 퇴근하는 데 쓰여도 좋다. 불필요한 일을 없앤다는 것은 비용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다. 시간은 조직이 사람에게서 빌려 쓰는 가장 귀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오래 한 일일수록 버리기 어렵다
사업에도 정이 든다. 내가 시작한 사업, 오랫동안 회사의 이름을 알렸던 제품, 한때 큰 매출을 올렸던 분야. 이제 수익성이 떨어져도 쉽게 접지 못한다.
“조금만 더 해보자.”
그 말에는 합리적인 판단도 있지만 때로는 과거에 대한 애착도 들어 있다. 특히 리더 자신이 시작한 일은 더 어렵다. 사업을 중단하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옳았던 선택이 지금도 옳아야 할 이유는 없다. 끝낼 때를 아는 것도 경영이다.
‘하지 않을 일 목록’이 필요하다
많은 조직에는 사업계획이 있다. 내년에 할 일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신제품 개발, 신규시장 진출, 교육, 투자, 마케팅. 그런데 한 페이지를 더 만들면 어떨까. 내년에 하지 않을 일 효과 없는 정기회의. 중복 보고. 사용하지 않는 지표. 관행적으로 이어온 행사. 수익성과 전략적 의미를 잃은 사업.
리더가 “무엇을 더 합시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이것은 이제 하지 맙시다”라고 선언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때 조직은 비로소 숨을 쉰다.
덜어냄에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인력부터 줄이고, 교육비를 줄이고, 연구개발비를 줄이는 식의 단순한 비용절감은 노자의 日損과 다른 문제다.
덜어냄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먼저 쓸모를 잃은 일을 덜어낸다. 다음으로 중복된 일을 덜어낸다. 그리고 리더의 불안 때문에 생긴 통제를 덜어낸다. 마지막까지 남겨야 할 것은 조직의 본질과 미래를 만드는 일이다.
좋은 덜어냄은 조직을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산행도 배낭이 가벼워야 오래 걷는다
처음 산행을 할 때는 이것저것 배낭에 넣는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 챙긴다. 걷기 시작한 지 한두 시간은 괜찮다. 그러나 오르막이 길어지면 작은 무게 하나까지 어깨에 느껴진다.
산을 오래 다닌 사람의 배낭은 의외로 단순하다. 필요한 것은 챙기되 불필요한 것은 넣지 않는다.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 알기 때문에 가볍다.
조직도 그렇다. 오래갈 조직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아닐 수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조직이다.
리더 자신의 일도 덜어내야 한다
조직의 회의와 보고만 줄이고 리더 자신의 일은 그대로라면 변화는 절반에 그친다. 리더도 물어야 한다. 내가 아직도 직접 결재해야 하는가. 내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회의인가. 내가 계속 만나야 하는 고객인가.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중요하다’는 이유로 붙잡고 있지는 않은가.
앞의 3부에서 이야기했듯 리더가 일을 내려놓아야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 그래서 조직의 덜어냄은 결국 권한의 덜어냄으로도 이어진다.
덜어내기를 유행처럼 시작해서는 안 된다.
“회의를 절반으로 줄입시다.”
“보고서를 없앱시다.”
숫자부터 정하면 필요한 것까지 사라질 수 있다. 먼저 물어야 한다. 이 일은 어떤 가치를 만드는가? 그 가치가 분명하다면 남긴다. 가치는 있지만 방식이 비효율적이면 방식을 바꾼다. 가치도 이유도 사라졌다면 그때 멈춘다.
덜어냄의 목적은 적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다.
다음 경영회의에서는 새로운 사업을 하나 제안하기 전에 오래된 일 하나를 꺼내보자. 그리고 세 가지를 묻자.
왜 시작했는가?
지금도 필요한가?
오늘 처음 검토한다면 다시 시작할 것인가?
마지막 질문에 모두가 쉽게 답하지 못한다면 그 일은 다시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조직 전체에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여러분의 시간을 가장 많이 빼앗으면서 가장 적은 가치를 만드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답 속에 조직이 덜어내야 할 것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조직에는 아무도 이유를 모르면서 계속하는 일이 얼마나 있는가?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기존의 일 하나를 끝내고 있는가?
성숙한 경영은 더 많은 일을 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알아보고 멈출 때 비로소 조직은 가벼워진다.
두 장을 지나며 ‘더’보다 어려운 한마디, ‘그만’
제46장의 不知足과 제48장의 日損을 나란히 놓으면 6부의 방향이 선명해진다. 하나는 묻는다.
“언제 충분한가?”
다른 하나는 묻는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
두 질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충분함을 모르면 덜어낼 수 없다. 계속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업을 줄일 수도 없고, 일을 줄일 수도 없으며, 권한도 내려놓기 어렵다. 반대로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다. 불필요한 사업을 내려놓고, 효과 없는 회의를 내려놓고, 관행적인 보고를 내려놓고, 모든 것을 내가 알아야 한다는 욕심도 내려놓는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덜어냈는데 조직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이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산에서도 배낭을 가볍게 한다고 물과 안전장비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꼭 필요한 것을 남기기 위해 불필요한 것을 꺼낸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덜어냄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만이 무엇을 버릴지 결정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이었다면 조직이 성숙한 뒤의 리더십에는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멈추는 능력. 끝내는 능력. 내려놓는 능력. 그리고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
사업에서도 삶에서도 우리는 시작한 날은 기억한다. 창업한 날, 공장을 세운 날, 첫 계약을 따낸 날, 새 사업을 시작한 날. 그러나 무엇인가를 잘 끝낸 날은 좀처럼 기념하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는 그런 날도 기억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오늘 이것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 결정 덕분에 사람의 시간이 돌아오고, 조직의 시선이 중요한 곳으로 다시 모이며, 다음 일을 시작할 여백이 생겼다면 그것 역시 훌륭한 경영의 성과다.
노자의 지족과 일손을 따라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한 문장을 남기고 싶다.
조직의 성장은 얼마나 많이 더했는가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그만둘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 조직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