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을 때 길이 보였다

by진경수

산에서 길을 잃으면 처음에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다. 조금 전까지 분명 길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발밑의 흔적이 희미해진다. 나뭇가지가 길을 막고, 등산로에서 흔히 보이던 표지나 리본도 눈에 띄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길이 나오겠지.’


그렇게 몇 걸음 더 간다. 그런데 길은 더 희미해진다. 이럴 때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길을 모른다는 사실보다 여기까지 왔는데 되돌아가기 아깝다는 마음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삶에서도 이 말을 참 많이 한다. 여기까지 공부했는데. 여기까지 투자했는데. 이 일을 몇 년이나 했는데. 이 사람과 얼마나 오래 함께했는데. 이미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잘못된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쉽게 돌아서지 못한다.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산에서는 분명하다.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돌아가야 한다. 오래 걸어왔다고 잘못 든 길이 옳은 길로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빨리 인정할수록 덜 헤맨다. 그래서 산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삶의 한 문장을 배운다.


되돌아가는 것은 지나온 시간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 길을 찾기 위한 걸음이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지도보다 어쩌면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그 말을 인정하고 나면 행동이 달라진다. 걸음을 멈춘다. 주변을 살핀다. 지도를 다시 확인한다. 지나온 길을 떠올린다. 필요하면 다른 사람에게 묻는다. 이상하게도 길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른다고 인정하는 순간 보이기 시작한다. 앞만 보던 눈이 주변을 살피기 때문이다.


삶도 그랬다.


“잘 모르겠다”


는 말은 길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2부에서 공부를 이야기하며 만났던 노자의 제71장, 知不知 尙矣(지부지, 상의),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귀하다는 말이 산에서는 관념이 아니라 몸의 지혜가 된다.



길을 잃어본 사람은 표지 하나가 고맙다


한번 헤매고 나면 평범했던 표지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등산로의 작은 리본 하나, 바위에 그려진 방향표시 하나가 안심을 준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다. 삶에서도 힘들 때 작은 친절 하나가 오래 기억된다. 막막할 때 건네받은 한마디.


“괜찮습니까?”

“천천히 해도 됩니다.”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대단한 해결바카라이 아닌데도 힘이 된다. 사람은 길을 잃었을 때 반드시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함께 지도를 들여다봐주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길을 잃어야 내 방향을 묻게 된다


늘 정해진 길만 걷고 있을 때는 방향을 묻지 않는다. 앞사람을 따라가면 된다. 표지판대로 걸으면 된다. 그러나 길이 사라지면 질문이 시작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려했는가.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삶에서 길을 잃는 시간도 어쩌면 비슷하다.


실패했을 때, 계획이 어긋났을 때, 익숙했던 일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묻는다.


‘나는 정말 어디로 가고 싶은가.’


그 질문은 길을 잃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질문일 수도 있다.


노자는 『도덕경』 제64장에서 말한다.

千里之行 始於足下. (천리지행 시어족하)

천 리 길도 발아래에서 시작한다.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러나 다시 길을 찾았으면 한 걸음이면 된다. 처음부터 모든 길을 알 필요는 없다. 지금 밟아야 할 한 걸음을 제대로 내디디면 된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이것이 마음에 든다. 남은 삶의 지도를 모두 그려놓을 필요는 없다.


오늘 배우고, 오늘 걷고, 틀렸으면 돌아오고,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면 된다. 산에서 길을 잃어본 뒤에는 갈림길에서 조금 더 천천히 걷는다. 주변을 살핀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한다.


삶에서도 그렇게 하고 싶다. 무조건 앞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때때로 멈추어 방향을 확인하는 사람. 그리고 길을 잘못 들었다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돌아설 수 있는 사람. 살아보니 길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길을 잃었는데도 길을 잃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이 더 위험했다.


길을 잃은 어느 날, 나는 오히려 길을 보는 법을 배웠다.



16.png


이전 16화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