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와 단풍 사이에서 삶을 묻다
“영국사와 1300년 은행나무를 지나 가파른 A코스 암벽을 올라 정상에 선 뒤 C코스로 내려온다. 한 호흡 사이의 삶과 죽음, 직벽 앞의 두려움과 용기, 바위에 뿌리내린 생명력, 오래된 사찰로 돌아오는 귀환의 의미를 만난다.”
정상 : 천태산 714.3m
출발 : 천태산공영주차장
거리 : 약 5.4km 원점회귀
주제 : 생명과 용기
산행일 : 2022. 11. 4.
01. 오래된 생명 앞에서 나를 돌아보다
“오래 산다는 것은 세월을 견디는 일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다시 땅에 내리는 일이다.”
영국사 은행나무의 한 가지는 아래로 자라 땅에 닿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굵은 새 가지가 솟았다. 오래된 생명은 높은 곳만 향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을 낮추어 땅과 만나고, 그 만남에서 다음 생명을 시작한다.
수많은 계절과 나라의 어려움을 지켜본 나무 앞에서는 사람의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그러나 짧다는 사실이 삶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늘 누구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지가 한 생의 깊이를 결정한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한 호흡 사이에 있다.”
제2 전망바위에서 만난 두 소나무는 보는 방향에 따라 삶과 죽음의 얼굴을 번갈아 보여준다. 숨을 쉬면 살아 있고 숨이 멎으면 죽음에 이른다. 너무도 분명한 경계 앞에서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새삼 깨닫는다.
“생사는 한순간이건만, 어찌 그리 집착하며 애끓게 사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붙잡는다고 영원히 머무는 것은 없다. 늦가을의 잎은 제 빛을 다한 뒤 조용히 떨어지고, 빈 가지는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삶을 사랑하되 소유하려 들지 않고, 때가 되면 보내줄 줄 아는 마음이 자연이 가르치는 비움의 지혜다.
02. 두려움 너머의 다음 손잡이
“쉴 곳이 마땅치 않아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다음 손잡이를 찾게 한다.”
75m 직벽에 매달리자 아래는 아찔하고 팔 근육은 떨린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로프를 바꾸어 잡고 다시 몸을 끌어올린다. 용기는 무섭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품은 채 지금 붙들어야 할 것을 놓지 않는 마음이다.
“바위를 토대로 거친 삶을 살아가는 나무에서 끈질긴 생명의 힘을 받는다.”
흙 한 줌 넉넉지 않은 암릉에서도 나무는 뿌리를 내린다. 척박함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살아갈 방식을 바꾸게 하는 조건이 된다. 삶의 환경을 탓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뿌리를 내릴 때, 단단함은 고난 속에서도 자라난다.
“낭떠러지 앞에서야 지금까지 올라온 높이와 내 안의 힘을 함께 보게 된다.”
제3 전망바위 아래로 펼쳐진 절벽은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아찔하다. 그러나 시선을 멀리 옮기면 붉게 물든 산과 영국사가 한 점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같은 자리에서도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두려움과 아름다움이 함께 존재한다.
험한 직벽을 지나 얻은 풍경은 쉽게 오른 자리의 풍경과 다르다. 수고가 경치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과정을 지나온 마음이 이전보다 깊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산은 높이만큼 시야가 아니라 마음도 넓혀준다.
03. 정상보다 깊은 귀환
“정상은 숲에 가려 있어도, 오르는 길의 풍경이 이미 산행의 깊이를 채워놓았다.”
천태산 정상은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이 넓지 않다. 그러나 정상에 무엇이 보이는가만으로 산행의 가치를 헤아릴 수는 없다. 은행나무와 두 소나무, 암벽의 로프와 전망바위에서 만난 순간들이 이미 마음속에 충분한 풍경을 이루었다.
하산길에는 잔돌과 낙엽, 마사토와 암반이 번갈아 나타난다. 오를 때의 성취감보다 내려갈 때의 신중함이 더 필요한 길이다. 정상에 닿은 뒤에도 발밑을 살피며 영국사와 일상으로 무사히 돌아갈 때 산행은 비로소 온전해진다.
“하산은 끝이 아니라 오래된 생명과 사람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영국사로 돌아와 합장하고 원각국사비와 삼층석탑, 연리지를 차례로 만난다. 산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한자리에 포개진다. 망탑봉의 흔들바위는 작은 힘에도 움직이지만 오랜 세월 제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흔들린다고 모두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천태산은 강함이 흔들리지 않는 데만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두려워하면서도 로프를 놓지 않는 일, 삶의 유한함을 알면서 오늘을 사랑하는 일, 정상에서 다시 일상으로 내려오는 일.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사람은 조금 더 단단해진다.
산이 남긴 질문
나는 사라질 것을 붙드느라 오늘의 생명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움 앞에서도 지금 붙들어야 할 다음 손잡이를 찾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