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세상에서 삶의 방향을 묻다
높이 : 1573m
출발 : 만항재 1330m
거리 : 정상까지 약 3km
주제 : 느림과 비움
산행일 : 2026. 3. 7.
01. 돌아갈 수 없는 길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삶 또한 앞으로 나아갈 뿐, 돌아갈 길은 없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길에서는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선행자의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옮기자 생각도 단순해졌다. 산행은 몸의 움직임으로 마음을 정리하게 했다.
“쉼은 나태나 태만이 아니다.”
걸림을 단숨에 밀어내기보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숨을 고르는 편이 더 멀리 가는 길일 수 있다. 쉼은 멈춤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며 다시 나아가기 위한 수행이다.
“느려진 걸음 덕분에 눈앞의 아름다움을 더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앞선 사람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따르는 사람에게 길을 내어주며 걸었다. 느림은 부족함이 아니었다. 서리꽃의 빛과 능선의 고요를 가슴 깊이 담게 한 또 하나의 눈이었다.
02. 삶의 아바타가 아니라 진짜 주인공으로
“이곳에서는 누구나 삶의 아바타가 아니라 자기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눈부신 설경 앞에 서는 순간, 타인의 시선과 세상의 역할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자연과 마주한 사람은 꾸며낸 모습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자연은 늘 같은 자리에 서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본질을 향하면서도 누가 말했는지를 먼저 따질 때가 있다. 그러나 산은 말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눈이 흐려질 때, 자연은 말없이 삶의 태도를 되묻는다.
“자신의 삶과 일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삶과 일 또한 귀하다.”
함백산 기원단에는 광부와 그 가족의 소박한 소망이 쌓여 있었다. 서로의 간절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자기 삶에 성실한 사람이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응답이다.
03. 상고대가 녹은 자리에도 아름다움은 남는다
“상고대는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공기와 습기, 온도와 바람이 잠시 만나 만든 형상일 뿐이다.”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서리꽃도 햇살이 비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진다. 명예와 성취, 걱정과 불안도 한때는 전부인 듯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또한 잠시 머문 형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라진다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고대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아름다움과 감동이 남는다. 비어 있음은 끝이 아니라 무엇이든 새롭게 생겨날 수 있는 자리다.
“잃어버린 장갑은 누군가의 손길로 나뭇가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선물 받은 장갑 한 짝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름 모를 산객이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내려놓음을 생각하던 길에서 되찾은 장갑은 사람의 선의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산이 남긴 질문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