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나는 나를 고쳐 쓰는 중이다

by진경수

글을 쓰다 보면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한 문장을 써놓고 다시 읽는다. 말이 너무 많으면 덜어낸다. 뜻이 흐리면 단어를 바꾼다. 앞 문장과 겹치면 지우고, 어울리지 않는 문장은 과감히 들어낸다. 때로는 꽤 마음에 들었던 문장도 전체 글과 어울리지 않으면 버린다. 그렇게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처음 썼던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이 된다. 요즘 나는 삶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한 번 쓰고 끝나는 원고가 아니었다. 나 역시 아직 퇴고 중이다.


젊은 날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젊었을 때는 확신이 많았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었다. 앞서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목표가 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 믿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면 조금 고쳐 쓰고 싶은 문장도 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 문장 뒤에 이제는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지는 가끔 물어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이 말에도 작은 단서를 붙이고 싶다.

‘다만 길이 잘못되었다면 돌아설 줄도 알아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꾸고 싶다.

‘성공도 좋지만 성공하는 동안 사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월은 내게 정답을 주기보다 오래된 문장에 자꾸 주석을 달아주었다.



잘못 쓴 문장을 발견하는 일


글을 쓰면서 가장 난감할 때는 오랫동안 공들여 쓴 문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다. 아깝다. 그동안 들인 시간이 생각난다. 조금만 손보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자꾸 붙잡게 된다. 그러나 잘못된 문장을 그대로 두면 다음 문장까지 어색해진다.


삶에서도 그랬다. 오래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옳은 생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해온 방식이라고 계속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을 잘못 판단했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했고, 내가 틀린 말을 했다면 인정해야 했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익숙하다는 뜻이지 반드시 옳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이가 들수록 지우개가 필요했다


젊은 날에는 연필이 필요했다. 무엇인가를 계속 써야 했기 때문이다. 경험을 쓰고, 경력을 쓰고, 배움을 쓰고, 이루어낸 것을 한 줄씩 더해갔다.


삶의 후반에는 연필과 함께 지우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집을 조금 지우고, 남과 비교하던 마음을 지우고, 오래된 서운함도 조금씩 지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문장에도 줄을 긋는다. ‘이 나이에 무엇을 새로 하겠는가’라는 문장은 아예 지워버리고 싶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 쓴다.


‘아직 배울 수 있다.’

‘틀리면 고치면 된다.’

‘늦게 시작해도 괜찮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문장을 더 많이 쓰는 일보다 필요 없는 문장을 잘 알아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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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문장도 고쳐야 했다


내가 가장 많이 고쳐야 했던 것은 어쩌면 사람을 판단하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저 사람은 원래 그래.”

“저 사람은 안 돼.”

“그 사람과 나는 맞지 않아.”


이런 문장은 쓰기는 쉽지만 지우기는 어렵다. 한번 마음속에 적어놓으면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의 행동을 그 문장에 맞추어 읽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달라졌다. 느리던 사람이 어느 날 자기 몫을 해냈고, 실수하던 사람이 단단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내가 잘못 보았던 사람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사람을 판단할 때 문장 끝에 마침표를 너무 빨리 찍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은 그런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침표 대신 여백 하나를 남겨두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다음 문장이 있을 테니까.



노자의 ‘불병’이 마음에 남는다


『도덕경』 제71장에서 노자는 말한다.


夫唯病病, 是以不病. (부유병병 시이불병)

자신의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병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자기 수정의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내 부족함을 모르는 것이 더 위험하다. 틀렸는데 옳다고 믿는 것,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 익숙한 생각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 그것이 생각을 굳게 만든다. 반대로 내 부족함을 알아차리면 고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다. 다음의 나에게 수정할 기회를 주는 일이다.



산길에서도 자꾸 고쳐 걷는다


산길을 걸을 때도 몸은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한다. 오르막이 가팔라지면 보폭을 줄인다. 숨이 차면 속도를 늦춘다. 길이 미끄러우면 몸의 중심을 낮춘다. 길을 잘못 들면 돌아간다. 그때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처음 정한 보폭을 끝까지 지켜야지.”


산에서는 상황에 맞추어 걸음을 바꾸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삶에서는 왜 한번 정한 생각과 방식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방향을 지키는 것과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산은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매 순간 걸음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주었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기쁨


이제 나는 완성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완성되었다는 말에는 더 이상 고칠 곳이 없다는 뜻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계속 고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 틀렸다면 내일 고치고, 새로운 것을 알았다면 생각을 바꾸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사과하고,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하면 오래된 방식을 내려놓는 사람.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이가 들수록 완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부드럽게 수정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문장을 쓰고, 읽고, 지운다. 다시 쓴다.


그러다 문득 내 삶을 돌아본다. 그곳에도 고쳐야 할 문장이 아직 많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은 내 삶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나를 최종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직 교정지가 남아 있는 사람.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읽고, 배우고, 걷고, 고쳐 쓰는 사람.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에 닿을 때까지 나는 아마 계속 나를 퇴고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를 고쳐 쓰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이 늙지 않는 또 하나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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