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사찰은 왜 국가 최고의 양조장이 되었나

by능도

오늘날 우리가 마트나 전통주 매장에서 마주하는 고급 전통주의 깊은 맛과 양조 기술은 사실 조선 시대가 아닌, 고려 시대 사찰에서 그 기틀이 완성되었다.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고려 시대에 사찰은 단순히 불공을 드리는 종교적 공간을 넘어, 국가 최고의 기술과 자본이 집약된 '최첨단 양조 기지'였다.


술을 금하는 불교 사찰이 어떻게 역설적으로 당대 최고의 양조장이 될 수 있었을까?


이는 당시 고려 사찰이 가졌던 독점적인 경제력과 슬롯적 위치를 들여다보면 명확해진다.


첫째로, 고려 사찰은 국가로부터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기증받은 대규모 경제 주체였다.


술을 빚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재료인 ‘쌀’이 사찰 창고에 차고 넘쳤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먹을 쌀도 부족해 감히 술을 빚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 사찰은 풍부한 잉여 곡물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술을 빚고 누룩을 배양하며 양조 기술을 실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로, 사찰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 집단이자 과학의 중심지였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승려들은 문헌을 통해 중국 송·원나라의 선진 양조 기법을 발 빠르게 도입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산속 환경과 사찰 특유의 엄격한 위생 관념은 미생물과 효모를 다루는 양조 발효 과학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들은 점차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덧술법(중양법)을 발전시키며 도수가 높고 향이 맑은 최고급 청주(법주)의 제조법을 정립해 나갔다.


셋째로, 사찰은 국가적인 숙박업과 접대 기관의 역할을 겸했다.


왕실이나 귀족, 심지어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지방을 순행할 때 사찰을 숙소로 삼았는데, 이때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사찰에서는 당대 최고급의 술을 의무적으로 빚어내야만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찰의 양조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다.

급기야 사찰들은 불상 조성이나 대규모 불사(佛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반 백성들에게 술과 누룩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상업적 양조업(사원 주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 부작용과 폐단이 얼마나 심했는지 실제 역사 문헌에 생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관찬 사서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1027년(현종 18년) 6월, 양주(楊州, 지금의 서울) 관할에 있던 장의사(庄義寺), 삼천사(三川寺), 청연사(靑淵寺)의 승려들이 술 빚는 것을 금지한 법령을 어기고 몰래 양조를 하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압수된 쌀의 양이 무려 360여 석(섬)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쌀 360석은 성인 수천 명이 동시에 마실 수 있는 막대한 양이다.

관가에서는 "술 빚는 법령을 어겼으니 법률에 의거해 엄히 단죄해 달라"라고 왕에게 보고했고 현종은 이를 허락했다.


이 적발 기록은 당시 사찰이 가내수공업 수준을 넘어 사실상 대형 양조 공장 못지않은 거대한 규모의 주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다.


계율상 술을 가장 멀리해야 했던 사찰이 역설적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술 문화를 꽃피운 주역이었다는 사실.


이 모순적이면서도 위대한 역사가 있었기에, 사찰의 곡차는 연면히 이어져 오늘날 우리 전통주의 뿌리가 될 수 있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