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 경험이 있는 이라면 알겠지만, 텃밭 작물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고추다. 각종 비타민과 철분, 인과 같은 유익한 성분도 풍부하여 식탁에 자주 오르는 작물이다. 텃밭에서는 주로 당조고추, 아삭이 고추, 꽈리 고추, 청양고추를 재배하는데 취향 따라 용도 따라 다양한 선택이 가능해서 도시농부에게는 일찍부터 사랑받고 있다. 온대 지방인 한국에서는 한해살이 작물에 속하지만, 원산지인 열대지방에서는 여러해살이 작물이라서 해외 재배 사진을 보면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고추나무를 재배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사람 키 높이 정도 되는 나무가 가지를 넓게 펼치고 가지마다 고추를 맺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 식탁에 흔하고, 매운맛에는 일가견 있는 민족이다 보니, 고추가 한국 전통 품종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고추의 원산지는 적도 부근 멕시코로 알려져 있다. 본래 한국에는 없던 작물이고, 언제 한국에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더운 나라에서 수년간 장수하던 작물이 한국 와서 겨울을 넘기지 못하는 한해살이 작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고추도 먼 타국에 와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앞서 고추의 다양한 영양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지만, 품종 따라서 영양이 달라서 용도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은 도시농부에게 중요한 일이다.
당조고추는 혈당 조절 효과가 있는 효자 고추다. 아삭한 식감은 오이고추와 견줄 만하고 파프리카와 비슷한 정도로 식사에 곁들어 먹는다면 혈당 증가를 조절하고 탄수화물의 소화 흡수율을 낮춰서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좋은 작물이다. 아삭이 고추는 그 이름처럼 아삭거리는 식감이 일품인데 대부분의 아삭이 고추는 과육이 두껍고 수분이 많으며 매운맛은 적어서 피망과 비슷하다는 품평을 듣기도 한다. 한편으로 눈 건강을 생각하고 꽈리 고추를 재배하는 도시농부도 많다. 꽈리 고추는 외형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고추 과육 표면이 쭈글쭈글하다. 부드럽고 연한 식감과 맵지 않은 맛으로 고기 장조림에 자주 곁들이는 고추가 꽈리 고추다. 꽈리 고추는 기름에 볶으면 함유한 베타카로틴 성분이 우리 몸에 더 잘 흡수된다. 고추 중에서 비타민 A와 C를 다량 함유하고 있고 유기산이 풍부하며 칼슘도 넉넉하게 품고 있는 고추도 있는데, 바로 청양고추이다. 한국에서 재배하는 고추 품종 중에서는 매운맛이 강하지만, 동시에 단맛도 풍부한 고추이다.
청양고추 이름에는 일화가 있는데, 흔히 생각하면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재배하거나 유래되어서 청양고추라고 부를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청양고추는 제주산 고추 품종을 태국 고추와 교배한 것을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양군에서 시험 재배하여 생산하게 되었고 청송과 영양의 이름에서 청양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금이야 고추의 매운맛이 사랑받고 있지만, 원래 고추는 식용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그 역시 고추의 매운맛 때문이었는데, 매운맛을 이용하는 무기로 사용하거나, 고추 탄 물로 몸을 따뜻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 소금이 귀해진 시기에 식량을 길게 보존하기 위해서 소금 대신 고추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시기에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아서 기록에 의존하여 말할 수밖에 없지만, 조선 후기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기 시작하기 전까지 한국의 김치는 백김치가 주된 종류였다. 고추가 들어가면서부터 한국 김치의 다양한 형태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고추가 우리 식탁에 일으킨 변화는 매우 크다.
한국 고추는 원산지와는 다르게 매운맛뿐 아니라 단맛도 강하여 감칠맛을 내는 용도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이웃한 나라에서도 감칠맛을 내기 위해서 고추를 사용할 때는 한국산을 쓰는 것이 좋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고추는 그 나름의 특성과 장점이 있는 작물이다. 매운맛과 감칠맛 두 가지 양면을 가진 덕분에 우리에게 널리 사랑받는 고추이지만, 고추는 재배가 그리 쉽지 않은 작물에 속한다.
고추 재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이나, 대표적인 이유는 재배 기간이 긴 것에 있다. 고추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1월에는 씨를 뿌리고 90일 정도 모종을 키워야 한다.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모종으로 키우는 동안에는 한국의 겨울을 이겨낼 온도를 맞춰주어야 한다. 그렇게 키운 모종은 4월 말 밭에 정식하게 된다. 길게 수확하는 경우에는 10월 말까지 여러 번 수확할 수 있다. 수확량도 적지 않아서 좁은 면적의 텃밭에서도 상당한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는데, 재배 기간이 길다 보니 오랫동안 신경 써주지 않으면 안 되는 작물이다. 도시농부의 대표 작물인 상추와 다르게 고추는 병충해에도 매우 약하다. 특히 탄저병은 한번 발생하면 수년간 반복되기 때문에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추위에도 약하지만 극심한 더위에도 타버린다. 바람에도 약해서 지주대를 적기에 잘 세워주지 않으면 쓰러져서 어렵게 키운 고추 농사를 망치기도 한다. 이 정도면 매운맛의 기상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거의 난초 같은 여린 작물이 고추다.
고추 농사가 초보 농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보니 고추 농사를 망치는 일은 종종 생긴다. 특히 올해에는 예년과 비교하면 장마가 조금 일찍 찾아왔다. 6월 말에 찾아온 초여름 장마는 짧은 시간 국지성 강우와 더불어 강한 바람을 안고 찾아왔다. 고추는 열매 맺기 시작하기 전에 보통은 지주대를 설치해주는데, 몇몇 텃밭 도시농부는 지주대 설치를 여름이 올 때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6월에 갑자기 찾아온 태풍급 장마 바람에 이제 막 실한 고추 열매를 맺기 시작하던 줄기가 바람에 꺾이고 쓰러졌다. 넘어진 고추는 일으켜 세워주면 되지만, 줄기가 꺾이면 살려내기 어렵다. 이른 봄부터 병충해 조심해가며 메마른 봄날 정성으로 돌본 고추가 바람에 쓰러진 모습은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다.
어느 날인가, 조금 이른 퇴근을 하고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를 피해 귀가하던 중 혜윰뜰 텃밭 인근 아파트 후문에서 혜윰뜰 농부 한 분을 만났다. 평소 텃밭 활동과 독서모임을 함께 하는 이웃이라 인사하고 지내는 이웃인데, 온라인 게임인이라 도시농부 활동이 쉽지 않음에도 꾸준히 참여하는 도시농부이다. 아파트 후문에서 만나 그날은 수확물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수확은 도시농부에게는 그동안 노력의 정당한 대가라 즐거운 경험인데 그날 이웃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집으로 올라오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난밤 심한 장마 바람에 고추가 많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매운맛답지 않게 여리고 약한 고추라는 작물을 신경 써서 키워온 농부로서는 속상한 경험인 것이다. 대가 부러져 쓰러진 고추는 살리기 어려워, 열매를 모두 수확하니 한 번에 너무 많이 수확하였기에, 우연히 만난 나에게 나눔 해주었다. 이웃에게는 가슴 아픈 수확이었지만, 나눔 받은 나는 그날 저녁 고추 찍어 먹을 쌈장을 만들었고, 쌈장을 곁들이면 좋을 숙성 잘된 고기를 꺼내서 가족과 즐거운 식탁을 만들었다.
평일 저녁에는 지친 마음으로 배달 음식이나 챙겨 먹었지만, 그날은 나눔 받은 고추 덕분에 오랜만에 가족이 한 상 정감 푸짐한 저녁을 누릴 수 있었다. 이웃에게는 마음 아픈 수확이었지만, 아픈 속에서도 나누어준 배려로 한 가족의 저녁에 기쁨이 넘쳤다. 지난밤 거센 장마 바람이 텃밭 고추는 쓰러뜨렸지만, 도시농부의 마음까지는 어쩌지 못하였다. 나눔 받은 이의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나누어준 도시농부에게도 전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