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겨울의 기록입니다.
아직 바람은 차고, 봄은 멀리 있다. 그래서 더 많이 그립고 기다려진다. 이십 대의 나는 유독 여름을 사랑했는데 여름철, 스콜처럼 쏟아지는 비가 내리면 우산 없이 거리 거니는 것을 참 좋아했다. 스콜은 태양 빛에 의해서 땅 표면이 심하게 가열되면서 발생하는 대류 현상이 주원인인데, 주로 늦은 오후에 소나기처럼 내리곤 한다. 여름을 사랑하던 나는 태양으로 한낮 동안 뜨겁게 달구어진 지표면을 시원하게 적시며 사라지는 그 순간의 청량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몰입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열대 지방 우기에는 스콜이 없는 날이 드물다는 말에 열대 지방에서 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삼십 대를 맞이하고 가정을 이루며 사랑하는 가족을 맞이하면서부터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몰입했다. 가정을 이루고 처음 맞이한 겨울, 언덕이 있는 마을에 살았던 나는 눈 내리는 아침이면 언덕길 눈 쓸기에 열중했다.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그 길을 걸어 내려갈 아내가 조금은 평온한 출근길을 걸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 당시 겨울을 좋아했던 이유는 마음속 추억이 담긴 따뜻한 기억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어렴풋하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생생한 추억이 하나 있다. 정말 춥고 눈 많이 내리던 겨울밤 크리스마스이브, TV에서는 찰스 디킨스 원작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이 방영 중이었다.
그날따라 귀가 늦은 아버지를 걱정스럽게 기다리는 어머니와 달리, 나는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영화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 창밖을 보니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 하얗게 흩날리는 눈을 보고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대문이 소리 없이 조용히 열렸다. 자정 무렵이 다 되었던 시간이었는데,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익숙한 큰 그림자가 보였다. 이날 아버지는 겨울에 밖에서 놀지 못하는 나와 동생을 위해서 꽤나 커다란 실내 그네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져오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날따라 가로등 불빛으로 스미는 아버지의 실루엣은 더 크고 따뜻하게 보였다.
겨울을 싫어할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어린 시절 그 기억 하나가 다른 모든 이유를 하찮게 만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별빛 한점 없는 추위 속에서도 먼 길을 짊어지고 온 선물에 담긴 온기는 그때까지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겨울을 녹여내고도 남을 따스함이 있었다. 그런 따스한 기억이 혼란스러운 삶의 순간마다 마음 바로잡아주고 지탱해주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지만, 어느 해 겨울 아버지는 소천하셨고, 해마다 겨울이면 그 기억에 겨울을 조금씩 멀리하게 되었다. 내가 멀리한다고 겨울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픔과 행복함이 공존하는 계절 겨울이 더 예전처럼 반갑지만은 않게 되었다.
사십 대 이후로 마을 활동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경작하고, 봄꽃을 누리며 가벼운 산바카라을 할 수 있는 계절 봄이 좋아졌다. 지나고 보면 나름의 이유를 붙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열정과 냉정의 시간을 지나, 그 중간 어딘가 있는 온화한 곳에 머무르고 싶은 자연스러운 변화를 남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마을 활동 중에서도 생명을 키우고 가꾸는 경작 활동을 하면서는 계절마다 변하는 선 굵은 전환기를 좀 더 살갑게 느끼게 되었다. 지구에서도 북반구 중위도에 있는 덕분에 우리나라는 사계절 변화가 참 뚜렷하다. 지구 자전축이 조금만 덜 기울어졌거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지 않았다면 이런 계절 변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계절의 변화가 없었다면 찬 바람 분다고 아픈 기억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계절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햇빛을 보내오는 태양이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겨울 햇살과 여름 햇살이 다른 것이 아니다. 태양은 늘 다름 없는 햇살을 보내올 뿐, 그것을 비스듬히 기울어져 공전하느라 계절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지구에 더 많은 바카라임이 있지 싶다. 개인의 추억이 얽혀있는 좋고 싫음을 떠나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절의 뚜렷한 변화가 가진 좋은 점도 많다. 나에게는 오래전에 따뜻한 곳으로 이민 간 지인이 있는데, 어느 날 SNS에 겨울 코트를 입고 싶다는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 당연한 일상이고 어찌 보면 거추장스러운 과정일 수 있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선망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겨울이 없다면, 따뜻하고 보드라운 겨울 롱코트를 입어볼 일은 없을 테니, 겨울이 주는 일상의 변화에도 행복이 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이점은 이외에도 많은데, 예를 들면 연평균 기온이 일정한 적도지방 보르네오섬의 곤충은 대체로 개체 크기가 매우 크다. 생물학자가 아니어서 그 이유는 유추해볼 뿐이지만, 계절 변화가 적은 지역에서 곤충은 생장 환경이 허락하는 만큼 크기를 키울 수 있도록 적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곤충을 몹시 두려워하는 개인적 입장에서는 보르네오섬 주변에 서식하는 거대 곤충을 일상에서 대하며 살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준 한국의 사계절이 무척 감사하다.
사계절 변화가 뚜렷한 덕분에 각양각색의 작물을 경작할 수 있는 점도 좋다. 텃밭에서 경작 활동을 하는 이들은 사계절보다 더 많은 계절을 경험하게 된다. 초봄, 봄, 늦봄과 같이 절기마다 심고 가꿀 수 있는 작물이 나뉘다 보니, 경작하는 이에게는 사계절이 아닌 거의 열하나의 계절로 구분되기도 한다. 다양한 작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 이외에도 여름과 겨울을 오가는 계절 덕분에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부레옥잠 같은 잡초도 한국에서는 그 해악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한국이 아열대 기후였다면 매년 호수나 유속이 느린 연못을 뒤덮은 부레옥잠을 제거하는데 더 큰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23.5도 자전축을 기울이고 공전 중인 지구 북반구에 있는 덕분에 얻는 경험은 평생을 경험한 덕에 익숙해서 그렇지,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신선한 축복일수도 있겠다. 겨울의 차가움을 태양에게 탓하기에는, 겨울 햇살과 봄 햇살을 공평하게 보내주고 있는 태양으로서는 모두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햇살은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주고 있는 것일 뿐이리라. 그럼에도 조용히 스며드는 기분 좋은 따스함을 안겨주는 친절한 봄날의 햇살이 오늘은 조금 그립다. 열정과 냉정의 사이를 뛰어다니며 얻은 아픈 상처를 자애롭게 어루만져주는 주말의 평온 같은 그 포근함이 그리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