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함께 지낼 다른 방법은 정말 없겠니?

by뭉클

학교에 향나무가 많다.

누가 언제 심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는 화단 한쪽에 어린아이처럼 얌전히 서 있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수십 번의 봄과 겨울을 났을 것이다.

줄기는 조금씩 굵어지고 가지는 옆으로 뻗어 이제는 화단의 경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막무가내의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러자 나무를 관리하거나 바라보는 이는 자주 막무가내 몇 그루는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던진다. 학교가 한결 정돈되어 보일 거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망설이게 된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뿌리가 건물을 들뜨게 하거나 쓰러질 위험이 있다면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그저 보기 싫거나 손이 많이 가서라면 나는 자꾸 못 들은 척 다른 질문으로 돌려버리고 만다. 사람의 눈에 정갈해 보이자고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그게 나의 생각이다.


얼마 전 <손석희의 12시, 질문들> 에서 최재천 교수의 '위기의 시대, 인간이 살아갈 방법'이란

방송을 들었다.

서울 부암동의 은행나무 한 그루에 관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서울 종로구 환기미술관 담장 밖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고 한다.

지난 봄 한창 잎이 푸르러야 할 계절에 나무의 잎이 때 이르게 노랗게 변하면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이 인근 CCTV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 화면에는 작업자들이 나무 밑동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무언가를 주입하는 모습이 담겨 있어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미술관 측은 은행나무에 제초제를 주입한 사실을 인정했다.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뿌리가 자라면서 미술관 외벽에 균열이 생겼고 담장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미술관 측은 이전부터 종로구에 민원을 제기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나무는 미술관이나 구청 소유의 땅이 아닌 담장 밖 공동사유지에 서 있었다.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미술관에서는 나무의 몸에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난 6월에 분개한 주민들과 환경단체가 미술관장과 재단을 경찰에 고발하였고, 나무를 살리기 위한 서명을 받고 치유 행사를 열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수사와 판단을 더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문제의 환기미술관은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기리는 곳이다.

그리고 김환기의 호는 놀랍게도 수화(樹話)였다.

樹話. 나무 수(樹), 말씀 화(話).
나무와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점과 색, 달과 산과 바다와 별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에 말로는 다 옮길 수 없는 어떤 고요한 세계를 짐작하게 된다.

그런 그의 호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무와 이야기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부암동의 은행나무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 이 곳에서 사람들이 태어나고 늙고 이 골목을 떠나는 동안 나무는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나무를 바라보고 어루만지며 말을 건내지 않았을까.

그런 나무의 몸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흘려 넣었다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 순간 그들은 나무를 무엇이라 여겼던 것일까.

단순히 치워야 할 장애물이었을까.

물론 담장이 무너져 사람을 다치게 할 위험이 있다면 그것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사건을 담장이 중요한가, 나무가 중요한가

라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로 보고 싶지 않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나무와 함께 살 방법을 충분히 찾아보았는가?

그러다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만났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주택 네 채를 짓던 개발업자들 앞에도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령 100년가량으로 보이는 거대한 은단풍나무.

여섯 층 높이 되는 이 나무의 뿌리가 하필 새 건물의 기초가 들어설 자리로 뻗어있었다.

처음에는 건축가도 나무를 살리면서 원하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랜 고민 끝에 나무를 베는 대신 건물을 바꾸기로 했다.

뿌리를 피하도록 기초를 다시 설계하고 상하수도관은 뿌리 아래로 지나가게 했다. 건물 일부는 뿌리를 침범하지 않도록 구조를 바꾸는 등 그렇게 나무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추가로 들어간 비용이 약 40만 달러였다.

나무를 건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건축을 나무에 맞춘 것이다.


부암동에서도 건축물과 나무가 충돌했고 뉴욕에서도 그랬다.

어느 쪽도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나무의 몸에 구멍을 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설계도를 수정하였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과 불편을 너무 쉽게 아까워해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그런 식으로 대해왔다.

강이 불편하면 물길을 바꾸고,

산이 가로막으면 깎아내고,

습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메워버렸다.

나무가 건물을 방해하면 베어버리는 방식이다.

자연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계의 필요에 따라 옮겨지고 잘리고 사라져도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자연은 더 이상 배경으로 머물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며칠 전 네팔과 티베트 접경의 히말라야에서 거대한 재난이 일어났다.

빙하가 관여한 대규모 붕괴로 얼음과 바위와 물이 뒤섞인 토석류와 홍수가 계곡을 따라 거의 100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최초 붕괴가 시작될 때 방송에서는 규모 5.2 지진이라고 했는데 결국 기온 상승으로 빙하가 무너진 쓰나미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빙하와 고산지대가 불안정해지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경고되고 있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북극의 얼음이나 먼 미래에만 있지 않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의 산이 무너지고, 거대한 물이 마을을 삼키고,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 재난의 모습으로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오랫동안 자연을 외면하며 살아온 시간의 대가가

곧 우리의 집 문 앞까지 밀어닥칠 것이다.

이런 시대에 나무 한 그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예전과 같을 수 있을까.

물론 나무 한 그루를 살린다고 기후위기가 멈추지는 않는다.

나무 몇 그루를 심는 것으로 우리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무를 심는 일만큼 이미 오래 살아온 나무를

가꾸고 지켜내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해마다 식목일이면 어린 묘목을 심는다.

한쪽에서는 나무를 심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수십 년 된 나무를 너무 쉽게 베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樹話, 나무와 이야기한다.

김환기의 호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대화한다는 것은 상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봄마다 새순을 내미는 것.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우는 것.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면 잎을 내려놓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무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부암동의 은행나무와 학교의 향나무를 같은 저울에 올릴 수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건은 자꾸 나를 학교의 향나무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학교의 나무들을 바라본다.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부터 해보려고 한다.

‘이 나무를 없앨까’가 아니라,
‘이 나무와 어떻게 같이 지낼까.’

조금 망설이고 조금 더 이유를 찾으면서 다른 길은 없는지 한 번쯤 더 돌아봐야 한다.

앞의 무거운 사건들 앞에서 내가 가져온 것이 겨우 학교의 향나무 몇 그루를 지키겠다는 다짐이라니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작은 망설임 하나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시작일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도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생태철학보다 나무 한 그루를 베기 전에 잠시 그 앞에 멈춰 서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김환기처럼 나무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너와 내가 함께 지낼 다른 방법은 정말 없겠니?"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