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클레어키건, 맡겨진 소녀, 다산북스, p.70 -
카더가든의 노래 'Home Sweet Home'을 듣고 있다.
"발걸음을 세며 비좁고 울먹인 벽들을 지나……."
노래를 듣다가 아주 오래전 알았던 한 소년, K를 떠올리고 만다.
비좁은 벽을 지나 발걸음을 세며 계단을 오르던 어린 K의 쓸쓸한 뒷모습이 음악 위로 겹쳐진다.
K는 구도심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만난 아이다. 한때 번성했던 도시는 조금씩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학교에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가정의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5학년 K는 나쁜 것을 너무 빨리 배운 아이였다.
중학생들의 술과 담배 심부름을 하다가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고, 학교 건물 뒤편에서 친구들과 담배를 나눠 피우다 적발되어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오기도 했다. 담임교사와 친구들에게 무례한 말로 상처를 주는 일도 잦았다.
어른들의 눈에 K는 명백한 '문제아'였다.
담임교사와 상담교사, 보건교사까지 힘을 보탰다. 타이르고, 혼내고, 상담하고, 보건소와 연계해 금연교육도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보았지만 아이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정방문을 갔다.
K는 연로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도심 한가운데 4층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분이었지만, 완고하고 화가 많아 보이기도 했다.
K가 사는 곳은 그 건물의 맨 위층이었다. 아래층에는 노래방과 유흥주점이 들어서 있었다.
아마도 K는 매일 술 취한 어른들과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현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노래방을 지나 그 계단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부모는 K가 아주 어릴 때 이혼했고, 재혼한 아버지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었다.
K에게는 돌아갈 물리적인 집은 있었다. 그러나 그 집에 돌아갔을 때 자신의 하루를 물어봐 줄 어른은 없었다.
가정방문을 다녀온 뒤 내 질문은 달라졌다.
'이 아이는 왜 이럴까?'가 아니라 '이 아이 곁에는 누가 있을까?'로.
K는 이미 담배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다. 담배를 끊으라는 말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이가 담배 말고도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때 K가 목공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말을 상담교사로부터 전해들었다.
수소문 끝에 아이를 받아줄 목공소를 찾았고, 교장선생님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예산도 마련했다.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상담교사와 번갈아 K를 목공소에 데려다주고 데려왔다.
K는 나무를 깎고 다듬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 재밌다고 했다. 제 손으로 만든 것을 보여주며 웃어주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K와 학교 텃밭을 가꾸었고 상담교사는 개별 상담을 이어갔으며, 보건교사는 보건소와 협력해 K의 금연활동을 도왔다. 가끔은 공원으로 데려가 함께 운동을 하고, 메뉴를 고르게 해서 함께 외식도 했다.
그렇게 여섯 달쯤 지났다.
학교에서 K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졌다.
원래 입담이 좋았던 아이는 어느새 활짝 웃으며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돌봐주는 선생님들을 안심시켰다.
그 아이에게도 그런 얼굴이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났고, K와 함께하던 시간도 거기서 끝이 났다.
얼마 뒤 K가 아버지와 함께 음료수를 들고 새로 옮긴 학교로 찾아왔다. K의 아버지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K와 나는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더 좋은 사람으로 만나자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도 했다.
K는 중학교에 진학했고, 연락은 차츰 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K가 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은 무엇이었나.
그동안의 작은 변화들이 결국 사라져 버린 건가.
K가 돌아가버린 처음 그 자리를 떠올려본다.
부모가 떠나고 혼자 남은 자리, 할머니 혼자 감당하고 있던 양육의 자리, 유흥주점 앞을 지나 오르내리던 계단. 나쁜 것을 가르치는 형들과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그런 자리, 그러나 정작 자신을 기다려주는 어른은 만나기 어려웠던 그 자리.
K앞의 그 모든 자리들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아이를 둘러싼 환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는데, 우리는 아이에게 달라지기를 기대하고 강요했다.
어쩌면 우리가 바꾸려 했던 것은 아이의 행동이었지, 아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제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가끔 K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다.
목공소에서 나무를 깎던 모습, 함께 공원을 달리던 시간, 제법 어른스럽게 건네주던 듣기 좋았던 말들 그리고 웃음띤 얼굴.
나에게는 K와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 무렵의 K에게 진짜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야 생각해본다.
함께 달리기를 하고, 바카라을 읽고,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시간. 잘못을 저질렀을 때 혼내더라도 돌아서면 다시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
그런 평범한 날들이 가능한 시간들이 쌓였다면 K는
달라졌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읽는다.
소설 속 소녀는 가난하고 무심한 가정에서 자라난다. 아버지는 거칠고 무바카라임하며, 어머니는 많은 자녀와 집안일, 농사일에 지쳐 있다. 누구도 아이를 충분히 돌볼 여유가 없다.
부모는 소녀를 입하나라도 덜고자 여름 한철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맡긴다.
그 집에서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잘 먹고, 깨끗이 씻고, 단정한 옷을 입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이 계속된다. 어른들과 함께 집안일을 하고 산바카라을 한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걸어주는 어른을 경험한다.
킨셀라 부부는 아이를 특별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이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로 느껴진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클레어키건, 맡겨진 소녀, 다산북스, p.70 -
킨셀라 아저씨가 손을 잡아주자 소녀는 비로소 아버지가 한 번도 자신의 손을 잡아준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그 깨달음이 아파 차라리 손을 놓아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함께 걷는 동안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는다.
아저씨는 아이가 발을 맞출 수 있도록 자신의 보폭을 줄인다.
나는 이 장면을 오래 생각했다.
아이에게 맞춰 보폭을 줄인다는 것.
어른의 속도로 아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걸을 수 있는 속도로 함께 걷는다는 것.
어쩌면 돌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K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끊임없이 설명해 주는 어른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봐 주는 어른. 잘못된 행동을 멈추게 하는 일만큼이나 그 행동 너머의 아이를 바라봐 주는 어른.
물론 K의 잘못된 행동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친구들이 입은 상처도, 교실에서 겪었던 어려움도 분명한 현실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안전과 배움을 지키는 일 역시 학교의 바카라임이다.
그러나 한 아이의 행동에 바카라임을 묻는 일과 그 아이가 그렇게 살아오게 된 조건을 이해하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둘 다 필요하다.
우리 슬롯는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능숙하다. 문제행동에 이름을 붙이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훈계하고, 때로는 처벌한다.
그러나 그 행동에 이르기까지 아이가 걸어온 길을 살피는 일에는 서툴다.
아이를 바꾸는 일보다 아이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는 일이 훨씬 어렵고 오래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가 다시 흔들릴 때 '문제아'라는 말로 설명을 끝내버리곤 한다. 그 말 뒤에 가려진 아이의 삶과 아이 곁에 있었어야 할 어른들의 자리는 충분히 묻지 않은 채.
좋은 교육과 상담, 프로그램과 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결국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는 사람, 약속한 날 다시 찾아오는 사람,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잘못을 꾸짖더라도 그 아이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아이에게는 그런 어른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한 사람의 어른이 아이의 삶을 모두 바꿀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아이의 삶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조건과 상처, 우연이 너무 많이 얽혀 있다.
K와 보낸 여섯 달이 그 아이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믿고 싶다.
그해 적어도 K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토요일이면 자기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었고, 자기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이 있었고, 목공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함께 공원을 달리고, 밥을 먹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어른들이 있었다.
그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카더가든의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지, 어디로 가려 했는지 묻는다.
K는 지금 어디쯤 걷고 있을까.
어느덧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고, 여전히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오래된 건물의 계단을 혼자 오르던 어린 K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야 생각한다.
그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보다 앞서 계단을 올라가 길을 가르쳐주는 어른이 아니라, 자신의 보폭에 맞춰 그 계단을 함께 올라주는 어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소설 <맡겨진 소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본다.
여름 한철을 보내고 소녀를 집에 데려다주고는 킨셀라 부부가 막 돌아서려 하는 순간. 소녀는 그들을 향해 달려가 킨셀라 아저씨를 힘껏 끌어안는다. 그때 소녀의 눈에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친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소녀는 두 사람을 향해 결심한 듯 이렇게 말한다.
"아빠."
한 사람에게는 경고하듯 "아빠",
그리고 소녀의 보폭에 맞춰 함께 걸어 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