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14화 복수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14화 〈복수〉



1219년 가을, 초원의 군대가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만호와 천호가 정해진 집결지로 모여들자 그 아래의 백호와 십호도 차례로 대열을 채웠고,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말 떼와 가축, 수레의 행렬도 걷잡을 수 없이 길어졌다. 병사들은 전투 중 갈아탈 예비마를 이끌었으며, 그 뒤로는 양과 소를 비롯한 가축 떼가 밀려왔다. 수레마다 천막과 활, 화살, 말린 고기와 가죽 물통처럼 먼 원정을 버텨낼 물자들이 빈틈없이 실렸다.


선두의 깃발이 지평선 끝의 언덕을 넘어 사라진 뒤에도 후미에서는 새로운 말 떼와 수레가 끊임없이 길 위로 올라왔다. 수만 개의 발굽 아래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마른 가을바람을 타고 대열 전체를 따라 흘렀고,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사람과 짐승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초원 자체가 서쪽으로 밀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호라즘이었다.


칭기즈 칸이 처음 그 나라로 보낸 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비단과 모피, 은과 여러 지역의 상품을 실은 사백오십 명의 상인이었고, 그들 가운데에는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에센과 함께 살기로 약속한 마리암도 있었다.


상단은 돌아오지 못했다.


바카라임자를 넘기라는 마지막 요구를 가지고 떠난 사절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죽었고, 남은 두 사람은 수염이 잘린 채 돌아왔다. 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남겨두었던 마지막 길마저 호라즘의 술탄이 스스로 닫아버린 뒤, 칭기즈 칸이 준비하라고 명령한 군대가 이제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에센도 그 거대한 행렬 안에서 말을 달렸다.


예전에는 수부타이의 말과 장비를 챙기며 군대의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지만, 지금 그가 있는 자리는 장수의 말고삐를 받아드는 곳이 아니라 활과 칼을 지닌 병사들이 모인 대열의 한가운데였다. 앞쪽에서 깃발이 기울 때마다 말머리를 돌렸고, 뒤따르는 말이 보폭을 잃으면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다리와 호흡부터 살폈다.


수부타이는 떨어진 곳에서도 그 모습을 알아봤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말 타는 자세와 어깨의 움직임은 갑옷을 걸치고 무기를 지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고, 다른 병사들이 앞의 깃발만 바라보는 동안에도 주변 말들의 걸음과 상태를 살피는 습관 역시 그대로였다.


그의 시선이 잠시 에센에게 머물렀다.


대열이 굽어 다른 기병들이 그 모습을 가리자 수부타이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에센이 다시 보이고 나서야 끝없이 이어진 서쪽의 지평선을 바라봤다.



───



호라즘의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자신의 군대를 한곳에 모아 몽골의 대군과 맞서지 않았다.


제국은 넓었고 지켜야 할 도시는 많았다. 병력은 오트라르와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여러 도시와 요새로 나뉘어 들어갔다. 높은 성벽과 충분한 수비병이 몽골군을 도시마다 붙잡아둔다면 멀리서 온 적은 군량이 떨어지고 말이 지칠 것이며, 결국 사막과 황무지 사이에서 스스로 힘을 잃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칭기즈 칸은 그 계산에 맞춰 싸워주지 않았다.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에게는 오트라르를 포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다른 부대들은 시르다리야를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였던 군대가 강과 초원, 사막의 길목을 따라 흩어지자 호라즘의 수비대는 어느 쪽이 주력이고 어느 쪽이 다음 목표로 향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에센이 속한 부대도 대열을 꺾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앞의 깃발을 따라가던 에센이 뒤를 돌아본 것은 오트라르로 이어진 길이 등 뒤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저곳에 이날축이 있었다.


마리암을 죽게 만든 사람이 아직 살아 있었다.


고삐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몇 번이나 오트라르 쪽을 돌아보던 에센에게 옆에서 달리던 병사가 말을 붙였다.


“계속 바라본다고 성이 따라오지는 않아.”


에센은 대답하지 않았다.


병사는 굳은 얼굴을 한번 살피고는 더 웃지 않았다.


“오트라르 말이야. 차가타이와 우구데이께서 포위하고 있으니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얼마나 걸릴까?”


“그걸 내가 알면 여기서 말을 타고 있겠어? 장수들 곁에서 지도를 보고 있겠지.”


병사는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 앞쪽을 바라봤다.


“그래도 언젠가는 무너질 거다. 성 안에 쌓아둔 곡식은 줄어들지만, 성 밖에 있는 우리는 계속 움직일 수 있으니까.”


앞에서 신호가 올라왔다.


대열이 넓게 벌어지면서 말머리들이 한꺼번에 방향을 틀었고, 에센도 마지막으로 오트라르 쪽을 바라본 뒤 앞선 말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등 뒤에 있었다.


전쟁은 에센에게 그 사람을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



며칠 동안 적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다가도 정찰대 하나가 돌아오면 부대 전체의 방향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호라즘의 기병대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흩어져 있던 부대들이 약속된 깃발과 연기 신호를 따라 모였고, 충돌이 끝나면 언제 함께 있었느냐는 듯 다시 갈라져 초원과 황무지 속으로 흩어졌다.


에센은 그 움직임 속에서 처음으로 병사의 눈으로 전쟁을 보기 시작했다.


수부타이 곁에서는 전령이 가져온 정보가 지도 위의 선과 방향으로 바뀌고, 서로 떨어져 있던 부대가 하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열 안으로 들어오자 세상은 훨씬 좁아졌다. 앞의 깃발이 오른쪽으로 꺾이면 오른쪽으로 달렸고, 속도를 늦추라는 신호가 오면 고삐를 당겼으며, 싸울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적이 얼마나 되는지 묻기 전에 활부터 꺼내야 했다.


어느 날 오후, 지평선 위로 누런 먼지가 솟았다.


처음에는 바람이 일으킨 흙먼지처럼 보였지만 먼지구름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빠르게 좌우로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이 만들어내는 낮은 울림이 땅에서 올라와 안장을 타고 에센의 몸까지 전해졌다.


앞쪽으로 나갔던 정찰병 하나가 말을 거칠게 몰아 돌아왔다.


“호라즘 기병입니다! 북서쪽에서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수부타이가 말을 세웠다.


“얼마나 되느냐?”


정찰병은 뒤를 돌아보며 거친 숨을 삼켰다.


“선두만 확인했습니다. 뒤에서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부타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병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먼지 아래에서 처음에는 검은 선에 불과했던 것이 조금씩 갈라지더니 말과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고, 좌우로 벌어지는 폭도 점점 넓어졌다.


호라즘의 기병대가 들판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수부타이의 명령이 전령들을 통해 각 부대로 전해졌고, 복잡한 전술은 대열 아래로 내려올수록 지금 당장 해야 할 행동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에센이 있는 자리까지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은 앞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였다.


“깃발을 놓치지 마라!”


에센이 활을 꺼내는 사이 말들이 동시에 속도를 높였다.


두 군대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호라즘 기병의 함성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을 뚫고 들려왔고, 그 소리에 놀란 말들이 콧김을 거칠게 뿜으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에센은 앞의 깃발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고정했지만 활을 쥔 손바닥에서는 자꾸 땀이 배어 나왔다.


첫 화살들이 하늘로 솟았다.


수백 개의 검은 점이 서로의 머리 위에서 교차한 뒤 비스듬히 떨어졌고, 에센의 오른쪽에서 달리던 말 한 필이 목을 길게 꺾으며 앞다리부터 무너졌다. 안장 위의 기수가 허공으로 튕겨 나가는 순간 뒤따르던 말들이 한꺼번에 방향을 틀었고, 흐트러진 대열 사이로 비명과 욕설이 터졌다.


그러나 앞의 깃발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자 앞줄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호라즘 기병이 벌어진 틈을 향해 파고들었고, 몽골 기병들은 정면에서 오래 버티지 않은 채 거리를 내주었다. 적이 달아난다고 생각한 호라즘 기병들이 속도를 높여 깊숙이 따라붙자, 앞서 달리던 병사들이 말 위에서 상체를 돌리며 일제히 활을 들어 올렸다.


에센도 허리를 비틀었다.


달리는 말의 등이 위아래로 거칠게 출렁였지만 어려서부터 안장 위에서 익힌 몸은 생각보다 먼저 그 요동에 맞춰 균형을 잡았다. 시위가 턱 가까이 당겨지고 손가락 사이에서 활줄이 팽팽하게 떨리는 순간, 먼지 속을 달려오는 기병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놓자 화살은 곧바로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맞았는지 확인할 틈은 없었다. 앞의 깃발이 다시 왼쪽으로 꺾였고, 수천 필의 발굽이 흙을 걷어차면서 전장은 순식간에 황갈색 먼지에 잠겼다. 에센은 몸을 앞으로 돌려 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몇 걸음 앞의 사람조차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깃발과 앞선 말의 엉덩이뿐이었다.


바로 그때 먼지를 찢고 검은 형체 하나가 튀어나왔다.


호라즘 기병이었다.


사내는 한 손으로 고삐를 움켜쥔 채 다른 손의 굽은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이 보일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에센은 활을 쥔 손에 함께 잡고 있던 고삐를 당겼다. 말이 옆으로 몸을 틀고 칼날이 어깨 곁의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는 순간, 에센의 오른손은 거의 반사적으로 시위를 끌어당겼다.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먼지로 뒤덮인 눈썹과 벌어진 입, 무엇인가를 외치려는 듯 일그러진 입술이 화살촉 너머에서 흔들렸다.


에센의 손가락이 시위를 놓았다.


사내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그러나 거의 같은 순간 다른 방향에서도 여러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고, 누구의 화살이 몸에 박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안장 위에서 잠깐 더 버티다가 말 옆으로 떨어졌으며, 뒤이어 밀려온 발굽과 흙먼지가 그의 모습을 삼켰다.


에센은 뒤돌아보지 못했다.


먼지 속에서 앞의 깃발이 다시 나타났고, 그것을 놓치는 순간 자신도 조금 전 땅에 떨어진 사람처럼 수백 개의 발굽 아래에 남을 수 있었다.


손은 이미 다음 화살을 찾고 있었다.



───



해가 지자 전장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조용해졌다.


낮 동안 수천 필의 말이 짓밟고 지나간 들판에 어둠이 내려앉고, 살아 돌아온 병사들이 작은 불 주변에 모여 찢어진 가죽끈과 안장을 손질하기 시작하자 조금 전까지 사람을 죽이던 손으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말린 고기를 뜯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어디선가 부상자의 신음이 들리는 동안 다른 불가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는 자신이 몇 사람을 쓰러뜨렸는지 떠들었고, 누군가는 아침까지 곁에 있던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고기를 씹었다.


에센은 회수한 화살 가운데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을 골라 바닥에 늘어놓았다. 화살촉 하나에는 검붉은 것이 두껍게 말라붙어 있었다. 엄지로 밀어보았지만 굳은 피는 쇠에 달라붙은 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늙은 병사가 그 모습을 보다가 자기 화살 하나를 집어 마른 모래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렇게 닦으면 손가락만 벗겨진다.”


남자는 모래 속에서 화살촉을 몇 번 비빈 뒤 다시 꺼냈다. 피가 벗겨진 쇠끝이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이렇게 해.”


에센도 화살을 모래에 꽂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알이 서걱거리며 갈렸고, 쇠끝을 덮고 있던 검붉은 흔적이 조금씩 벗겨졌다. 낮에 말에서 떨어졌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화살이 그를 맞혔는지, 다른 병사의 화살이 먼저 박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내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은 보았다. 그러나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은 다음 화살을 꺼내고 있었다.


에센이 화살촉을 한 번 더 모래에 비비자 금속빛이 다시 드러났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 소매가 밀려 올라가 홍옥수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빛 아래에서는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이고 어느 것이 마리암의 것인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자리가 깨진 구슬 하나가 옆의 구슬에 걸려 비스듬히 돌아가자 에센은 그 작은 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낮에 쓰러진 사내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 사람에게 자신을 기다리는 이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마리암을 죽인 자들의 얼굴과 이름 역시 알지 못했다. 자신은 이날축을 찾아 서쪽으로 왔지만, 오늘 화살을 겨눈 사람들 가운데 이날축은 없었다.


불 속에서 장작 하나가 갈라졌다.


에센은 깨끗해진 화살을 화살통에 넣고 소매를 내려 팔찌를 가렸다. 늙은 병사가 다음 화살을 건넸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받아 다시 모래에 꽂았다.


전쟁은 누구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



에센이 먼지 속에서 깃발을 좇는 동안, 칭기즈 칸이 이끄는 주력군은 호라즘이 대군의 진격로로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키질쿰.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메마른 땅과 모래, 드문 우물 사이로 이어지는 길은 소수의 상인과 여행자에게도 위험했다. 수만의 사람과 그보다 훨씬 많은 말을 이끌고 건너려면 우물 하나를 놓치거나 이동 속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적과 싸우기 전에 말부터 쓰러질 수 있었다.


그래서 호라즘은 그 사막을 방패로 믿었다.


칭기즈 칸은 그 방패를 길로 바꾸었다.


낮에는 사람의 입술과 말의 콧구멍이 갈라질 만큼 건조한 바람이 불었고, 밤이 되면 낮 동안 달아올랐던 땅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면서 추위가 천막과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우물을 만날 때마다 가죽부대에 물을 채웠고, 다음 물이 있는 곳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해 말과 사람의 속도를 조절했다.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사막을 가로지른 행렬이 도시 가까이 다다랐을 때, 외곽의 망루에서 경계를 서던 호라즘 병사가 지평선에 번지는 먼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먼지는 사라지지 않고 점점 길어졌다. 병사가 눈 위에 손을 얹고 다시 바라보자 누런 장막 아래에서 검은 점들이 하나둘 솟아올랐고, 곧 그 뒤를 수없이 많은 말과 사람, 깃발이 채웠다.


올 수 없는 방향에서 군대가 오고 있었다.


1220년 2월, 칭기즈 칸의 주력군이 부하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막을 방패처럼 믿었던 도시에게 몽골군은 성문 앞으로 진격해온 적이 아니라 아무도 지키지 않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적에 가까웠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밀려온 대군 앞에서 방어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부하라는 함락되었다.


주민들은 성 밖으로 내몰렸고, 도시 안에 쌓여 있던 재물은 승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끝까지 저항하던 성채의 병사들은 죽었으며,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불길이 건물과 지붕을 타고 번지면서 오랫동안 사람과 상품, 학문이 모여들던 거리 위로 검은 연기가 솟았다.


그 소식이 에센에게 도착했을 때 그는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전령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병사 하나가 진영으로 돌아오며 외쳤다.


“부하라가 함락됐다!”


에센이 고개를 들었다.


부하라.


마리암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였다.


손에 들고 있던 가죽 물통이 조금 기울면서 물이 넘쳤고, 말의 입가를 타고 떨어진 물방울이 메마른 땅 위에 검은 점들을 만들었다.


“오트라르는?”


“아직 버티고 있다더군.”


에센은 기울어진 물통을 바로 세웠다.


마리암을 죽게 만든 사람은 아직 살아 있는데, 마리암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는 먼저 무너졌다.


말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물통 안으로 주둥이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



부하라 다음에는 사마르칸트가 있었다.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던 몽골군이 다시 그 거대한 도시를 향해 모여들었고, 에센도 수부타이와 함께 사마르칸트를 포위한 군대에 합류했다. 멀리서부터 지평선을 막고 있던 성벽이 가까워질수록 높이를 더하자, 에센은 자신도 모르게 고삐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지금까지 보아온 성들과는 규모부터 달랐다. 끝을 한눈에 담기 어려운 성벽 위로 수비병과 깃발이 빽빽하게 늘어섰고, 성 안쪽에서는 지붕과 탑들이 겹겹이 솟아 있었다.


그때 성문 근처에서 거대한 짐승들이 움직였다.


주변 병사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번졌다.


코끼리였다.


에센도 상인들의 이야기에서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전쟁터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보다 훨씬 높은 등 위에 병사와 장비를 얹은 짐승이 긴 코를 휘두르며 울부짖자, 소리와 냄새에 놀란 군마 몇 필이 고삐를 거슬러 옆으로 튀었다.


한 병사가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저런 걸 어떻게 상대하지?”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격이 시작되자 구경할 틈도 사라졌다.


공성병기에서 날아간 돌이 성벽을 때릴 때마다 땅속까지 울리는 굉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고, 성 위에서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성 밖으로 나온 호라즘 기병과 몽골군이 충돌하면서 들판 전체가 사람과 말, 먼지와 쇳소리로 뒤엉켰다.


코끼리가 앞으로 움직이자 에센의 말도 몸을 크게 떨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는 고삐를 짧게 당긴 뒤 말의 목을 두드렸다. 손바닥 아래에서 팽팽하게 굳은 근육과 빠르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괜찮아.”


말에게 한 말인지 자신에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앞에서 신호가 올라왔다.


다시 전진이었다.


앞선 부대가 지쳐 빠지면 뒤에서 기다리던 병력이 그 자리를 채웠고, 물러난 사람들은 화살을 보충하고 말을 바꾼 뒤 다시 차례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 쓰러져 생긴 틈은 오래 비어 있지 않았다. 전장은 누가 죽었는지 기억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새로운 사람을 그 자리에 밀어 넣었다.


에센도 몇 번이나 성벽 앞으로 나갔다.


밤이면 말을 먹이고 화살을 골라냈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활을 들었다.


그러나 사마르칸트는 성벽만으로 버티지 못했다.


성 안에서 항복하려는 자들과 끝까지 싸우려는 병사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몽골군이 한꺼번에 안으로 밀려들었다. 곳곳에서 저항이 이어졌지만 한 번 무너진 방어를 다시 하나로 묶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성벽 위의 깃발이 바뀌었다.


하지만 에센의 눈에 오래 남은 것은 승자의 깃발이 아니었다.


성 밖으로 끌려나온 포로들이 끝을 알 수 없는 줄을 이루었다. 기술을 가진 장인들은 따로 분리됐고, 젊은 남자들 가운데 일부는 짐을 나르고 공성에 동원될 사람들과 함께 다른 대열로 보내졌다.


울음과 고함이 여러 언어로 뒤섞였다.


에센은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말을 타고 포로들의 행렬 옆을 지나던 중, 한 여자가 아이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끌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는 어린 소년을 다른 줄로 보내려 했고, 여자는 무릎이 땅에 끌려 옷이 찢어지면서도 아이를 놓지 않았다.


무슨 말을 외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뜻은 알아들었다.


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병사가 여자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온 옷자락이 팽팽하게 늘어났다가 놓였고, 소년은 다른 포로들 사이로 끌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요.


서쪽으로 떠나기 전 수부타이 앞에서 내뱉었던 말이 자신의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그때 에센이 떠올린 것은 이날축과 오트라르의 병사들이었다. 눈앞의 여자도, 울면서 끌려가는 아이도 아니었다.


말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어머니와 아이가 가까워졌다가 에센의 뒤로 밀려났다. 아이의 울음은 다른 포로들의 고함 속에 묻혔다가 다시 들려오기를 반복했다.


에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리암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붙들면 앞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은 마리암의 얼굴과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에센은 끝내 자신이 조금 전 무엇을 보지 않은 척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



그 무렵 오트라르에서는 긴 포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시가 포위된 뒤 다섯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외성의 방어는 끝내 무너졌지만, 이날축은 남은 병력과 함께 내성으로 들어가 다시 버텼다. 한 달 가까이 저항이 이어지는 동안 사람도, 화살도, 먹을 것도 줄어들었으나 그는 항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몽골 병사들이 내성의 벽 위로 올라왔을 때, 이날축의 곁에는 처음 거느렸던 군대의 흔적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쏘아 보낼 화살이 떨어지자 그는 발밑의 돌을 집어 들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병사를 향해 던진 돌이 갑옷을 때리고 튕겨 나갔고, 다시 몸을 숙여 다른 돌을 찾는 사이 등 뒤에서 쇠붙이가 성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봤을 때에는 다른 쪽에서도 몽골 병사들이 성가퀴를 넘어오고 있었다.


이날축은 칼을 뽑아 가장 가까운 병사를 밀어냈지만, 한 사람을 베어내자 곧바로 다른 병사가 옆에서 달려들었다. 뒤에서 팔이 감기고 무릎 뒤를 걷어차이면서 몸이 돌바닥에 부딪쳤으며, 손에서 빠져나간 칼은 성벽을 긁으며 멀리 미끄러졌다.


병사 하나가 칼을 치켜들었다.


“죽이지 마!”


칼날이 이날축의 목 위에서 멈췄다.


칭기즈 칸은 그의 시체를 원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이날축을 원했다.



───



오트라르가 함락됐다는 소식은 사마르칸트에 있던 에센에게도 전해졌다.


화살을 살피던 에센에게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끝났다.”


에센이 고개를 들었다.


병사가 북쪽을 가리켰다.


“오트라르가 무너졌어.”


에센의 손에서 화살이 멈췄다.


“이날축은?”


“잡혔다.”


“죽었어?”


“아니. 산 채로 끌려온다더군.”


에센은 입을 다물었다.


그토록 죽기를 바랐던 사람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런데 살아서 끌려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 가슴에서 솟아야 할 기쁨이나 후련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오래 기다리던 어떤 일이 마침내 자기 앞까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 느껴졌다.



───



포박된 이날축은 몽골군의 감시 아래 사마르칸트로 끌려왔다.


그가 지나온 길 양쪽에는 불탄 집과 버려진 마을이 이어졌고, 반대 방향으로는 고향에서 쫓겨난 포로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라즘의 국경도시를 지배하며 사람의 목숨과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했던 총독에게 이제 허락된 것은 병사들이 정한 방향으로 발을 옮기는 것뿐이었다.


사마르칸트가 가까워지자 이날축은 고개를 들었다.


성벽 위에 몽골의 깃발이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시선을 돌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트라르에서 상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던 날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호라즘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마르칸트의 쿠크사라이 근처에서 처형이 준비되었다.


병사들은 땅을 파고 숯을 쌓아 화덕을 만들었다. 대장장이가 풀무의 바람을 밀어 넣을 때마다 숯 사이로 밝은 불길이 솟았고, 열기가 주변의 공기를 흔들면서 가까이 선 사람들의 얼굴까지 붉게 물들였다.


그 위에 도가니가 놓였다.


병사들이 가져온 은붙이들이 하나씩 안으로 들어갔다. 단단한 은의 가장자리가 열기 속에서 서서히 무너졌고, 서로 다른 모양이었던 장신구와 은 조각들은 끝내 본래의 형태를 모두 잃은 채 하나의 액체로 섞였다.


처음에는 이날축도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풀무가 다시 움직이고 도가니 안에서 녹은 은이 붉은 불빛을 받아 출렁이자, 포박된 그의 시선이 그곳에 붙잡혔다.


그제야 몸이 움직였다.


병사들이 양쪽에서 어깨를 눌렀다. 묶인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이날축은 몸을 비틀었고, 달아오른 도가니가 긴 집게에 물려 화덕 위로 들리는 순간 지금까지 굳어 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가 드러났다.


“놓아라! 나는 호라즘의 총독이다! 술탄께서—”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병사들이 그의 머리를 뒤로 젖히자 도가니가 기울었다.


녹은 은이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가는 순간 살과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가 치솟았고, 이날축의 비명이 주변의 말소리와 풀무 소리를 한꺼번에 덮어버렸다. 포박된 몸이 활처럼 휘면서 발뒤꿈치가 땅을 파헤쳤고, 목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몇 번이나 갈라졌다가 갑자기 멎었다.


뒤틀리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오트라르의 총독 이날축이 죽었다.



───



에센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처형이 끝난 뒤였다.


말의 등에 엉겨 붙은 땀과 먼지를 마른 풀로 문질러 닦고 있는데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이날축이 죽었대.”


에센의 손이 멈췄다.


“어떻게?”


“은을 녹여 눈과 귀에 부었다더군. 상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 때문에 그렇게 죽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


병사는 손가락으로 자기 눈가를 가리키며 몇 마디를 더 보탠 뒤, 같은 소식을 전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걸어갔다.


에센은 말 옆에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암의 아버지가 자신의 손바닥에 홍옥수 세 알을 내려놓던 순간부터 이날축의 죽음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 칼에 목이 잘리든, 말발굽에 짓밟히든, 자신이 직접 화살을 박아 넣든, 그가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가슴속에 박혀 있던 무언가가 조금은 빠져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말은 에센의 손길이 멈추자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와 목덜미의 냄새를 맡았다. 따뜻한 콧김이 피부에 닿았고, 말의 갈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손등을 스쳤다.


에센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말의 털에 엉겨 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손가락으로 갈기를 풀어주다가 소매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자신의 홍옥수 사이에 더해진 마리암의 구슬 세 알이 손끝에 차례로 닿았다.


마지막 구슬의 깨진 가장자리가 손가락에 걸렸다.


이날축은 죽었다.


마리암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센은 팔찌에서 손을 떼고 말의 목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말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 놓인 마른 풀을 씹었고, 진영에서는 다음 이동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누구도 죽은 이날축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누구도 돌아오지 못한 마리암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



그날 해가 기울 무렵, 칭기즈 칸의 새로운 명령이 진영에 도착했다.


사마르칸트를 잃은 술탄 무함마드 2세가 서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가 살아서 흩어진 병력을 다시 모은다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술탄을 추격하라.


그 명령을 받은 장수는 두 사람이었다.


제베와 수부타이.


두 사람에게 맡겨진 기병은 삼만이었다.


명령이 전해지자 진영의 풍경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땅에 박혀 있던 천막 말뚝이 뽑히고, 접힌 천막이 말과 수레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은 화살의 수를 세고 활줄의 상태를 확인했으며, 지친 말에서 안장을 벗겨 오래 달릴 수 있는 예비마의 등에 옮겼다.


에센도 자신의 말 앞에 섰다.


안장과 복대를 확인하고 활과 화살통을 몸에 걸친 뒤 등자에 발을 올렸다. 수부타이가 앞쪽에서 말을 돌리자 제베의 깃발도 바람을 받아 서쪽으로 기울었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도망치는 술탄이 멈추지 않는다면 추격대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팔이 울리자 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트라르는 이미 등 뒤에 있었다.


에센의 앞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땅과,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술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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