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이스탄불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2 — 〈HLP〉


제4화 〈이스탄불〉



2050년, 이스탄불.


천현승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아직 밤의 기운이 엷게 남아 있었다.


잠시 뒤 밤새 불투명하게 닫혀 있던 스마트 창이 서서히 투명해지면서 보스포루스 해협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푸른 빛을 머금고 있던 수면 위로 아침 햇살이 길게 번졌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과 화물선들은 물살을 가르며 흰 포말을 남겼다. 멀리 다리 위에서는 차량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물가를 따라 겹겹이 들어선 오래된 건물과 첨탑들도 밝아지는 하늘 아래 하나씩 윤곽을 되찾고 있었다.


수백 년 전에도 사람들은 저 물길을 건넜을 것이다. 배의 모양과 도시의 모습은 몇 번이고 달라졌지만 해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두 대륙 사이를 흘렀다.


현승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등 아래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올라오자 양손으로 허리를 받친 채 천천히 몸을 폈다.


“아이고.”


쉰 살이라는 숫자는 생각할 때보다 몸으로 느낄 때 훨씬 구체적이었다.


그가 욕실로 향하는 동안 방 안에서는 밤새 켜져 있던 뉴스가 낮은 음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북대서양에서 발달한 초대형 허리케인이 미국 동부 해안으로 접근하면서 플로리다와 조지아 일부 지역에 대피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상습 침수지역이 확대된 가운데 당국은 이번 폭풍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현승은 별다른 반응 없이 욕실 문을 열었다.


“남유럽에서는 폭염이 열흘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의 낮 최고기온이 45도를 넘어서면서 냉방 수요가 급증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 사용 제한 조치가—”


샤워기가 쏟아내는 물소리가 진행자의 목소리를 덮었다.


잠시 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온 현승은 거울 앞에 섰다. 눈가와 이마에는 세월이 눌러놓은 선이 제법 깊어졌고, 턱을 덮은 짧은 수염 사이에는 흰 털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발굴 현장을 돌아다니며 햇볕과 먼지, 바람을 오래 맞은 피부에는 실내에서 나이 든 사람과는 다른 거친 결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현승이 그런 변화를 특별히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며칠씩 지내다 보면 면도 한 번 하는 것도 귀찮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귀찮아서 안 깎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짧게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머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 쓸어 넘긴 뒤 다시 거울을 봤다.


“이 정도면 됐지.”


세면대 한쪽에 놓인 작은 장치를 집어 오른쪽 귀 뒤에 붙였다.


Galaxy 100.


얇은 기기가 귓바퀴 뒤의 굴곡에 맞춰 붙자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진동이 한 번 전해졌다.


“빅스비, 오늘 일정.”


“오전 일정은 세 건입니다.”


현승의 눈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펼쳐지며 일정과 메시지, 날씨가 차례로 나타났다.


“현재 이스탄불 기온 33.4도. 오늘 최고기온은 43.2도로 예상되며 폭염경보는 9일째 유지 중입니다.”


주방 쪽으로 나온 현승은 자동 커피머신 아래 놓인 잔을 집었다. 샤워하는 동안 미리 내려진 커피는 벌써 미지근해져 있었다.


“43도?”


한 모금을 마신 뒤 혀를 찼다.


“어제보다는 낫네.”


시야에 떠 있는 일정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회의는 취소됐잖아.”


“어제 21시 14분 상대 측 요청으로 취소되었습니다.”


“그럼 지워. 뉴스도 끄고.”


일정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방 안을 채우고 있던 뉴스도 조용해졌다.


현승은 커피를 든 채 창가로 걸어갔다. 해협 건너 아시아 쪽 도시는 한층 강해진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깨어나고 있었다.


그때 현관에서 짧은 신호음이 울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노라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서른을 조금 넘긴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또렷한 이목구비에는 날카로움보다 차분하고 지적인 인상이 먼저 배어 있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도 부드러웠으며, 구김 없는 셔츠와 반듯한 자세 역시 특별히 시선을 끌 만큼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오래 보고 있으면 조금씩 차이가 보였다.


막 아침을 맞은 사람에게 있을 법한 나른함이 없었고, 눈가에 피로가 쌓이는 일도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고 해서 무심코 체중을 한쪽 다리로 옮기거나 어깨를 늘어뜨리지도 않았다. 움직임이 지나치게 반듯했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주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정확하게 머물렀다.


그런 차이도 노라가 말을 시작하면 금세 희미해졌다.


현승이 커피잔을 들어 보였다.


“한잔할래?”


노라가 잔을 내려다봤다.


“제가 마시는 걸 본 적 있으세요?”


목소리에는 기계 특유의 억양 같은 것이 없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료에게 아침부터 시답잖은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약간의 어이없음까지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없지.”


“그런데 왜 매번 물으세요?”


현승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사람처럼 만들어놔서 자꾸 까먹는다.”


“저는 안드로이드입니다.”


“알아. 기계잖아.”


노라가 잠시 그를 바라봤지만 현승은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카이세리에서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어젯밤 퀼테페 인근 산악지역에 집중호우가 있었고, 오늘 새벽 3시 17분경 산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도로 복구 과정에서 붕괴된 토사면 안쪽에 인공물로 추정되는 물체들이 노출됐습니다.”


커피잔을 들고 있던 현승의 손이 멈췄다.


“퀼테페?”


“네.”


잔을 내려놓은 현승이 곧바로 말했다.


“빅스비, 화면 열어.”


눈앞의 공간이 넓어지며 대형 화면이 펼쳐졌다. 노라가 현장 자료를 전송하자 밤새 비에 젖은 아나톨리아의 산비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산허리 한쪽이 크게 무너져 있었다. 황갈색 토사는 아래쪽 도로까지 길게 밀려 내려와 있었고, 복구용 중장비 몇 대가 진흙 속에서 작업을 멈춘 채 서 있었다. 화면만으로는 무너진 흙의 양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붕괴 범위가 컸다.


현승은 커피를 잊은 채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 더 있어?”


“고해상도 정지영상 17장입니다.”


“전부 띄워.”


사진들이 한쪽으로 펼쳐졌다.


현승은 그것들을 빠르게 넘겼다. 끊어진 도로와 흘러내린 토사, 드러난 지층의 색과 돌의 배열을 차례로 살피던 손가락이 어느 사진 앞에서 갑자기 멈췄다.


“잠깐.”


사진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여기 확대해.”


황갈색 흙 사이로 주변과 색이 다른 물체가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는 뭐로 보여?”


“현재 영상만으로 성분이나 기원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추정은?”


“원하신다면 가능성이 높은 순서대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현승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네가 먼저 답을 주면 나도 모르게 거기에 끌려가. 적어도 첫 판단은 내가 할래.”


“확증편향을 우려하시는군요.”


현승이 노라를 흘겨봤다.


“그 어려운 말을 꼭 해야겠냐?”


“정확한 표현이니까요.”


“그래서 싫다는 거야.”


그는 다시 사진을 넘겼다.


“처음 발견한 기록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도로 복구 작업자 세 명의 현장 영상이 남아 있습니다.”


“첫 번째 발견자 것부터 보여줘.”


화면이 바뀌었다.


안정된 드론 영상 대신 사람의 몸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한 흔들리는 시야가 나타났다. 작업자의 거친 숨소리 사이로 빗물이 장비와 작업복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고, 진흙을 밟을 때마다 화면이 크게 출렁였다.


카메라는 흙에 파묻힌 도로와 멈춰 선 중장비를 지나 새로 무너진 사면을 향했다.


그러다 발걸음이 멎었다.


작업자가 무언가를 본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출된 토사면 사이에서 작은 물체 하나가 비죽 나와 있었다.


현승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정지. 3초 전.”


영상이 되돌아갔다.


“거기.”


현승의 손가락이 화면 한쪽을 짚었다.


“확대해.”


영상이 커지고 보정이 들어가면서 빗물과 흔들림에 뭉개졌던 윤곽이 조금씩 살아났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현승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현장에서 손댄 사람 있어?”


“없습니다. 발견 직후 복구 작업이 중단됐고 현재 튀르키예 문화유산 당국과 HLP가 현장을 공동 통제하고 있습니다. 추가 붕괴 가능성 때문에 사면 안쪽의 인간 출입도 금지됐습니다.”


“조사는?”


“안드로이드 조사팀이 투입되었습니다. 노출된 물체와 주변 지층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긴급 보존 조치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친 사람은?”


“보고된 인명 피해는 없습니다. 다만 초기 복구 작업에 투입된 작업용 안드로이드 세 기가 토사에 매몰되어 전손됐습니다.”


현승의 굳어 있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사람 안 다쳤으면 됐어. 사람이 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군.”


“그래서 사람이 들어가지 않은 겁니다.”


현승이 노라를 돌아봤다.


“너희도 세 대나 깔렸다며.”


“작업용 기체는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비싸잖아.”


노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사람보다는 쌉니다.”


현승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웃었다.


“그건 맞네.”


지도를 불러낸 그는 퀼테페 본 유적과 산사태 현장을 한 화면에 놓았다.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어?”


“직선거리 약 18킬로미터입니다.”


현승의 시선이 두 지점을 오갔다.


“18킬로미터…… 애매하군.”


“무엇이요?”


“퀼테페와 바로 연결하기에는 멀고, 아무 관계 없다고 잘라버리기에는 또 가까워. 이 근처를 지나는 고대 교역로 후보는?”


지도 위로 여러 개의 선이 나타났다.


“복수의 경로가 제시되어 있지만 정확한 노선은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현승이 고개를 돌렸다.


“또 모른다는 거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에는 반박할 것이 없었다.


현승은 지형을 조금 더 확대해 살펴보다 화면을 닫았다.


“가서 보자.”


“출발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제야 현승이 노라를 돌아봤다.


“벌써?”


“현승이라면 직접 확인하러 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내가 안 간다고 했으면?”


“취소했을 겁니다.”


“진짜?”


노라가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요.”


현승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너 요즘 말이 이상해졌어.”


“현승에게 배운 겁니다.”


“그럼 좋은 건 아니네.”


그는 재킷을 집어 들었다.


───

승강기가 HLP 본부 최상층에 도착해 문을 열자 냉방된 실내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현승은 숨이 막힐 만큼 뜨거운 열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옥상의 비행데크로 걸어 나갔다.


“아침부터 이러냐.”


“현재 33.6도입니다.”


“알아. 숫자로 다시 들으니까 더 덥다.”


데크 아래로는 보스포루스가 한눈에 펼쳐졌다. 해협을 오가는 배와 두 대륙을 잇는 다리, 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이스탄불의 건물들이 강한 햇빛 아래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데크 한쪽에는 HLP 표식이 새겨진 중형 전기 수직이착륙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과 현장 장비를 함께 운송하도록 설계된 기체로, 짧고 넓은 동체 주변의 회전익은 아직 접혀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자 기체가 신원을 확인했고, 측면 문과 발판이 동시에 열렸다.


현승은 먼저 올라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별도의 조종석은 없었고, 앞쪽까지 이어진 실내에는 좌석과 장비 적재공간만 나뉘어 있었다.


“퀼테페까지 얼마나 걸려?”


“현재 항로와 기상조건으로 1시간 58분입니다.”


현승이 안전장치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멀기는.”


노라가 맞은편에 앉은 뒤 문이 닫히자 바깥의 바람 소리가 끊겼다. 잠시 뒤 접혀 있던 회전익이 펼쳐지며 낮은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고, 기체는 거의 흔들림 없이 수직으로 떠올랐다.


HLP 본부가 발아래로 빠르게 멀어지면서 보스포루스의 폭이 넓어졌다. 조금 전 창밖에서 바라보던 다리와 건물도 점점 작아졌고, 거대한 도시는 높은 곳에서 하나의 촘촘한 무늬처럼 펼쳐졌다.


현승이 좌석에 몸을 묻자 노라가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 주요 동향입니다.”


현승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꼭 지금 해야 돼?”


“일일 브리핑이 남아 있습니다.”


“짧게 해.”


기체가 이스탄불을 벗어나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 동안 노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흑해 연안의 장기 가뭄으로 밀 생산량 전망이 다시 하향 조정됐습니다. 일부 생산국에서는 추가 수출 제한을 검토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는 곡물 가격 상승에 따른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유럽에서는 폭염으로 냉방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 사용 제한 지역이 확대됐습니다.”


현승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도시를 바라봤다.


“또?”


“인도와 파키스탄은 인더스강 수자원 배분 문제로 예정돼 있던 실무협상을 취소했습니다. 일부 접경지역의 경계 수준도 상향됐습니다.”


현승이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도 세상 잘 돌아가네.”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승이 고개를 돌렸다.


노라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현승이 웃었다.


“그래. 잘 안 돌아간다.”


시야에 떠 있던 브리핑 화면을 손짓으로 닫았다.


“나머지는 나중에.”


“알겠습니다.”


노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기체가 순항 고도에 접어들자 바닥을 통해 전해지던 진동도 거의 사라졌다.


이스탄불 외곽을 지나면서 풍경은 빠르게 달라졌다. 고속도로 위에서는 자율주행 차량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흘렀고, 건물들이 드문드문해진 자리로 농경지와 발전시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동쪽으로 들어서자 아나톨리아의 넓은 땅이 시야 끝까지 펼쳐졌으며, 누렇게 마른 들판 사이로 길게 늘어선 태양광 설비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간신히 초록빛을 유지한 농지에서는 무인 농기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현승이 앉은 채 허리를 펴자 노라가 곧바로 알아차렸다.


“허리가 아프십니까?”


“조금.”


“지난달에도 같은 부위에 통증을 느끼셨습니다.”


“그걸 기억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승이 고개를 저었다.


“별걸 다 기록하네.”


“건강정보는 중요합니다.”


“내 허리보다 지금은 저 산이 더 중요해.”


노라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둘 다 중요합니다.”


현승은 대꾸하지 않고 산사태 현장 사진을 다시 불러냈다.


황갈색 흙 사이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낸 물체는 몇 번을 들여다봐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눈길이 더 오래 머물렀다.


“노라.”


“네.”


“퀼테페하고 관련 있다고 생각해?”


“현재 확보된 자료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현승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또 그 대답이네.”


“정확하니까요.”


“그래. 그래서 데려다니는 거지.”


그가 화면을 닫았다.


기체는 계속 동쪽으로 날아갔다.


───

두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기체가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창밖 풍경은 이스탄불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 아래로 넓은 평원과 산줄기가 이어졌고, 곳곳에는 지난밤 폭우가 남긴 흔적이 보였다. 흙탕물이 고인 길과 물살에 깊이 팬 땅, 새로 흘러내린 토사가 기체 아래로 천천히 지나갔다.


고도가 더 낮아지자 도로 위에 복구 차량과 중장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제선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오갔지만 붕괴된 사면 가까이에는 인간의 모습이 없었다.


대신 몇 개의 형체가 흙더미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는 노출된 지층 앞에 몸을 낮춘 채 작업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붕괴면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표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HLP 안드로이드 조사팀이었다.


기체가 착륙을 위해 크게 방향을 틀자 그 뒤로 산비탈 전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승의 몸이 자연스럽게 창 쪽으로 기울었다.


몇 번이나 사진으로 들여다봤던 곳이었지만 실제로 보는 산은 화면 속의 그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산허리 한쪽이 길게 무너져 있었고, 밤새 물을 먹은 토사는 아래쪽 도로까지 밀려 내려와 복구 장비 일부를 삼킨 채 굳어가고 있었다.


무너져 나간 자리에는 그동안 땅속에 숨겨져 있던 지층이 길게 드러나 있었다.


황갈색과 적갈색, 조금 더 어두운 흙이 서로 다른 두께로 포개져 있었고, 가까워질수록 그 사이사이에 박힌 돌과 작은 파편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승은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한 덩어리의 흙처럼 보이는 산도 그에게는 달랐다. 어느 층이 먼저 쌓였고 어느 순간에 끊겼는지, 무엇이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이고 무엇이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인지, 땅은 말없이 지나간 시간을 품고 있었다.


지난밤의 비는 그 일부를 우연히 드러냈을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체가 착륙 지점에 접근하자 산비탈이 창 위쪽으로 천천히 밀려났다. 발밑에서 착륙 장치가 펼쳐지는 기계음이 들렸고, 곧이어 바닥을 통해 가벼운 충격이 전해졌다.


현승은 재킷의 지퍼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측면 문이 열렸다.


뜨겁고 습한 공기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비에 젖은 흙냄새가 기체 안을 채웠다.


현승은 무너진 산비탈을 바라보며 발판을 내려갔다.


제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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