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독립하기 전에 많이 배워두기로
혼자 살면 좋은 점: 엄마 아빠가 없다.
혼자 살면 안 좋은 점: 엄마 아빠가 없다.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부모님과 같이 살아서 누릴 수 있는 그들의 역할은 실로 엄청나다. 집 안에 고장 난 것들 고치기, 곰팡이 제거하기, 맛있는 저녁 요리하기, 지네나 바퀴벌레 같은 무시무시한 벌레 잡기 등등. 이 외에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셀 수 없이 많다.
한 번쯤은 직접 하라고 할 법도 한데 생각해 보면 엄마는 한 번도 그런 비스무리한 말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심지어 막힌 세면대를 뚫고 있다고 하니 엄마가 하겠다며 나를 말린 적도 있었다.
언젠가 집에서 저녁을 차려줄 때 했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집 나가면 지겹도록 해야 하니까, 집에 있을 때라도 하지 마."
이 말을 해주던 그때의 엄마는 당신의 딸이 서른까지 안 나가고 같이 살 줄은 몰랐겠지? 미안 엄마..
지금도 같은 마음인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행동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독립하기로 결심한 이상, 스스로를 바카라임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혼자서도 해낼 줄 알아야 한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건 보호이자 사랑인 동시에 독립하기 위한 힘을 기르는 걸 어렵게 한다. 어렵다기보다는 자꾸만 미루게 만드는 데에 가깝달까. 그들은 날 보호해 주지만 익숙함에 젖어가는 딸은 점점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건 편하지만 불편하다. 솔직히 말하면 편한 건 누릴 대로 다 누리면서 불편한 것들만 수면 위로 꺼내어 나가 살고 싶다는 볼멘소리를 하는 것 같기도 해 뜨끔할 때가 있다.
집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고장 난 물건을 살피고, 각종 복잡한 서류와 문제를 처리하며, 불편한 일을 미루지 않는 것 등. 슬롯가 정해둔 어른의 기준과 독립의 의미는 비교적 선명하지만, 실제로 독립이란 건 생각보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로 가득함을 요즘 들어 느낀다.
스무 살이 되면 성인이 되지만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지는 않듯이, 서른 살이 되었다고 해서 당연히 내가 나를 바카라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나를 위해 해결해 주던 것들을 스스로 도맡기 시작할 때, 독립은 비로소 시작된다.
모든 걸 다 해내지 못하더라도 괜찮고,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다.
곰곰이 그동안의 모습을 돌아보다가 이내 생각은 다른 곳으로 튀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부모님은 나의 독립을 늦출 수도 있지만 나의 독립을 위한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은 뭐든지 잘 해내며 심지어 처음 마주하는 문제더라도 그동안 축적해 온 연륜과 내공을 통해 뚝딱 해결한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까다롭고 어려운 어른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좋은 독립 선생님이 가까이 있는데도 그동안 몰라봤다니..
아무 생각 없이 "아, 엄마가 대신해 줘서 편하다" 생각하면 의존이 되겠지만 보고 배우기 시작하면 독립의 연습이 될 수 있다. 그동안은 변명의 여지없이 전자에 속했다. 게으른 인간..!
이제는 어깨너머로 배우며 하나씩 혼자 해보고 있다. 부끄럽지만 얼마 전 막힌 세면대를 처음 뚫어봤다. 처음에는 세면대 뚫는 법을 검색했는데 알고 보니 엄마만의 비법이 있어 전수받았다. 전수받은 비법으로 세면대를 뚫으니 세상 시원하게 내려가는 게 앞으로도 세면대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든든함이 차올랐다.
한 번은 오밤중에 수도꼭지가 갑자기 터진 적이 있었는데,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아빠가 급하게 꽁꽁 틀어막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중에 혼자 살 때 수도꼭지가 터지면 어떡하지? 혼자 해결할 수 있나?' 유튜브 영상을 보니 생각보다 충분히 혼자서 해결할 만했다. 결국 스스로 고쳐볼 기회는 없었지만 덕분에 수도꼭지 셀프 수리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매번 부모님이 처리해 주던 보험 관련된 것들도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부모님과 같이 살면 생각보다 보험을 포함해 각종 서류에 무지한 무지렁이가 되는 경우가 꽤 많지 않을까 싶다. 내가 어떤 실손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지, 실비 서류는 어떻게 청구하면 되는지 직접 해보면서 비로소 체득해 가는 중이다.
부모님이 해주던 모든 일들을 혼자서 떠맡게 된다고 생각하면 버거워 보이지만, 그동안 누군가 맡아주었던 내 삶의 몫을 하나씩 돌려받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어쩌면 비로소 그래야만 하는 일이고 나에게 필요한 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세면대와 수도꼭지, 그리고 실손보험 서류의 덕이 크다.
정말로 집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없이 덩그러니 남지 않도록 지금 많이 보고 배워둬야지.
그래도 바선생은 도저히 안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