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익숙한 기도 밖에서

내게 익숙한 모습만 알아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bySungang

성당에 들어가면 성수를 찍어서 성호를 긋고, 제대를 향해 절을 한다. 그다음 나도 모르게 익숙한 것들을 찾는다. 처음 방문한 곳에서도 그것들을 알아보면 마음이 놓인다. 사제로 살아온 시간이 낯선 공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에티오피아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익숙한 것을 알아보는 일과 그곳의 신앙을 이해하는 일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나에게 익숙한 물건들이 있었지만 그 속에서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도 있어서 머뭇거리기도 했다. 알고 있는 익숙한 장소라 더 빨리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익숙함이 오히려 눈을 가렸던 것들이 많지 않았을까? 사진을 다시 보며 묻게 된다.

익숙한 이야기가 낯선 모습으로

에티오피아 성당 내부의 벽화와 샹들리에.png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파란 바탕의 성화가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가운데 성화가 그려진 문 안쪽이 제대다.

에티오피아는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 양식인 우리나라의 성당과는 모습이 다르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 왕의 후손이라는 오랜 전승이 있다. 벽 가득한 성화 앞에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의자에 앉아 이 그림들을 보며 기도해 왔을 것이다. 성당 안쪽 제대는 거룩한 곳으로 사제만 들어갈 수 있고, 평소에는 볼 수 없도록 벽으로 가려져 있다. 다만 벽에는 성경의 장면들이 가득하다. 인물들의 얼굴과 옷, 선명한 색과 화면을 채우는 방식도 우리에게 익숙한 성화와는 다르다. 나에게도 생소하기에 자연스럽게 그림들을 따라가며 벽을 가득 메운 성화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는 성경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장소마다 표현하는 방식과 색깔의 조합이 다 다르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 그곳의 신앙의 모습에서는 그 땅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유럽식 성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 생소하고 특별하게 보인다.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땅의 색과 얼굴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성화를 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설명에 앞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왜 이런 색을 썼는지, 이 얼굴을 보며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이 그림 앞에서 어떤 기도를 해 왔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때 내게 익숙한 모습도 누군가에게는 낯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연스럽다고 여겨 온 성당의 모습과 성화의 표현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워 온 것이었다.
낯선 그림 앞에서 내가 배워 온 눈을 잠시 내려놓고 싶어졌다. 곧바로 해석하기보다, 이곳 사람들이 오래 바라보아 온 모습을 나도 조금 더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방식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우는 마음으로 따라 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알고 있는 이야기 앞에 다시 멈추다.


IMG_5674.JPG검은 가시관 아래 예수님의 얼굴. 금빛 십자가를 배경으로 양옆에 상처 난 두 손이 있다.

교구청을 방문하였을 때 가시관을 쓴 예수님의 얼굴이 있었다. 커다란 가시관과 상처 난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도 수없이 보아 온 수난의 모습이었다. 사제로서 그 고통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해 왔고, 전례 안에서 그 길을 되새겨 왔다. 이 성화 앞에서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너무도 많았고, 그 느낌을 풍부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오래 바라볼수록, 내가 알고 있는 말이 많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해졌다.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알고, 충분히 바라보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기 때문에 너무 빨리 지나쳐 온 적이 훨씬 더 많은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들을 때도 그랬을지 모른다. 위로가 될 만한 말을 찾느라, 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정작 눈앞의 얼굴을 놓쳤던 순간들이 나에게 정말 많았다.
성화 속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면서 잠시 멈추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잘 아는 설명보다 머무는 시간일 수 있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이야기 앞에서도 다시 멈출 수 있어야 했다.
믿음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바라보는 일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래 알고 지낸 얼굴일수록 다시 살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수난의 얼굴 앞에서 나는 다시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의 삶 안으로 들어온 믿음


마젠타 모자와 내민 손.png전통 가옥 안에서 주교님이 손을 들어 축복하신다. 어둠 속에 선 사람들 뒤로 전구 하나가 켜져 있다.

어두운 실내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에티오피아 주교님의 손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여러 얼굴이 보인다. 사진을 보면서 그때 오간 말과 모임의 사정이 생각났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주셨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와 믿음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당에서 고백한 말은 이런 만남의 자리에서도 이어진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전례를 거행하고 기도를 바친다. 그 시간이 하루를 붙들어 주지만, 하루에는 기도문으로 정돈되지 않는 순간도 많다. 갑작스럽게 누군가를 만나고, 예상하지 못한 부탁을 듣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기도 한다. 그런 순간에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생각해 본다. 바쁘다는 이유로 대화를 서둘러 끝내지는 않는지, 상대의 말을 충분히 듣기 전에 내가 아는 답을 꺼내지는 않는지.
사진 속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장면은 내 믿음이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묻게 한다. 미사와 기도의 시간에만 사제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예기치 못한 자리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성경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길에서 보여 주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기도 안에서 고백한 사랑을 하루의 관계 속에서 다시 배우고 싶다. 그 배움은 익숙한 기도문을 읽을 때보다 더디고 서툴다. 그래도 그 자리를 지나치지 않는 것이 내게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자리에 모인 서로 다른 마음


에티오피아 구브리(Gubre) 지역에서 선교하시는 각 나라의 수도자들이 한 공간에 앉아 있다. 손을 모은 사람도 있고, 고개를 숙인 사람도 있다. 함께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각자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기도를 바친다고 해서 모두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감사할 일이 있을 테고, 누군가는 걱정을 안고 왔을 것이다.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 날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 누구의 마음도 겉모습만으로 알 수 없다.

창가 빛 속의 조용한 사람들.png구브리에서 함께 기도하는 수도자들. 수도복의 색과 모양이 저마다 다르고,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사제로서 공동체와 함께 기도할 때, 나는 때때로 눈에 보이는 반응을 살폈다. 사람들이 집중하고 있는지, 내가 전한 말이 닿았는지, 함께하는 시간이 의미 있게 흘러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앞서면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의 시간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반응이 크지 않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환하게 웃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예전에 성당에 늦게 오는 사람들이 못마땅해서 미사 시간이 시작하면 성당 문을 잠그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난 본당보다 특수사목을 오래 해서 출퇴근의 어려움을 안다. 그 뒤로는 늦게라도 미사에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니 문을 잠근 신부님은 자기 기준에서 기대한 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들이 함께 놓여 있다. 그 사정을 모두 알아야만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사람의 자리를 남겨 두는 것. 서둘러 같은 마음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 나는 공동체 안에서 기다리는 법을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반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마음으로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조급함을 내려놓는 일이다.


기도가 지나간 자리에서


IMG_5582.JPG구름 사이로 해가 지며 빛살이 퍼진다. 하늘 아래 가는 띠처럼 나무와 낮은 지붕과 가로등이 남아 있다.

하루가 저물고 있다. 노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조금 내리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성당에서 나와 걷고, 누군가를 만나고, 해야 할 일을 이어 가는 시간의 연속들. 기도하는 동안 마음에 품었던 것들은 그 시간 속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기도를 잘했는지 묻는다면 나는 무엇으로 대답할까?
마음이 평안했는지, 집중이 잘 되었는지, 어떤 깨달음이 있었는지가 잘한 기도일까? 오히려 기도 뒤에 만난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는지가 더 합당한 기준이 아닐까?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서둘러 판단한 적이 훨씬 많았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 곧바로 틀렸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마음을 모르면서 다 안다고 여겼다. 그런 자리가 쌓이면 내 기도는 기도의 자리에만 남고 하루에는 닿지 않을 것이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도, 이전보다 조금 덜 서두르고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내 기도는 나에게 흔적을 남긴 것이다. 빛 아래에서 사람들의 생활은 이어질 것이다.
나 역시 내게 주어진 하루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고, 듣고, 때로는 잘못 판단한 것을 고치며 살아가야 한다.


다시 배우는 사람으로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신앙의 모습들을 돌아보며, 나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보다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더 자주 묻게 되었다. 나는 사제로 그곳을 방문했지만, 그곳에서도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오래 기도해 왔다는 사실이 모든 기도의 모습을 이해하게 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을 살아온 만큼 더 조심스럽게 듣고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익숙한 기도 밖에서 만난 장면들을 마음에 남긴다. 그리고 다시 익숙한 자리에서 기도한다.
기도문은 같아도, 그 기도를 바치고 일어서는 나의 태도는 조금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만날 사람을 내가 알고 있는 모습 안에 서둘러 가두지 않기를. 그의 말을 조금 더 듣고, 내가 아직 모르는 삶이 그 앞에 있음을 기억하기를.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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