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2021년 봄, 영화 한 편이 잔잔하게 마음 한쪽을 적셨다. 낯선 미국 땅에 뿌리 내리려는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미나리>였다.
영화 속 할머니는 자신이 심은 시냇가의 미나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뽑아 먹을 수 있어. 아플 땐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Wonderful)이란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던 이 말은 식물 하나의 이야기를 넘어 인간 삶 전체를 향한 이야기 같았다. 영화 속 가족의 삶이 그러했다. 야심 차게 세웠던 계획은 무너지고 성공은 멀어 보이지만, 그들은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살아갈 기틀을 다진다. 마치 묵묵히 흙을 뚫고 올라오는 미나리처럼 말이다.
물가에 툭 심어놓으면 어느새 그곳을 자신의 터전으로 만드는 미나리는 강인하다. 흔히 그 질긴 생명력에 주목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투쟁보다 '순응'에 가깝다. 흐름을 거슬러 세상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끝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낸다. 그렇지만 이때의 순응은 체념이 아니다. 흐름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살아나는 능동적 방식이다.
미나리는 고인 물이 아닌 흐르는 물을 선호한다. 고인 물은 산소가 부족해 부패하지만 흐르는 물은 끊임없이 생명의 기운을 나른다. 그 흐름 속에서 미나리는 물에 녹은 오염 물질을 흡수하는 필터가 되어 자신이 머무는 자리를 조금씩 맑게 바꿔 간다. 홀로 돋보이려는 게 아니다. 자신이 머무는 자리를 건강하게 살려내는 것이 미나리의 운명이다.
요리에서도 미나리는 주재료보다 음식의 향을 돋우는 부재료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보조적인 역할이 없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요리의 풍미는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속한 자리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내는 존재. 미나리의 품격은 바로 거기에 있다.
생명력의 정점은 '회복'에 있다. 미나리는 줄기가 잘려 나가도 뿌리만 있다면 다시 자란다. 애써 일군 결실이 한순간 불길에 사라진 그날 밤, 영화는 절망의 순간을 설명하는 대신 조용히 시냇가를 비춘다.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강력했던 그 장면은, 잘려 나간 자리에서 기어이 새순을 틔우는 생명력이 곧 회복임을 보여준다. 꺾인 자리에서 새순이 돋는 것, 그것이 미나리가 오랫동안 살아남아 온 방식이다. 우리 삶 또한 마찬가지다. 진정한 회복은 무너지거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처 입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가려는 힘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도 시냇가에는 미나리가 무성했다. 할머니의 외침은 빈말이 아니었다. 사람도 미나리처럼 자란다. 좋은 조건만 찾아 헤매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상처를 통과하며 다시 움트는 존재는 오래 남는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존재도 늘 앞장서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 배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은 그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자기 몸을 녹여 흐름을 만들고 끝내 주변을 살려내는 존재. 그 수상의 무게는 '조연'이라는 이름을 가뿐히 넘어섰다.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끝내 이야기를 완성하는 존재, 미나리처럼 말이다.
세상은 늘 주인공이 되라고 말하지만, 미나리는 다르게 살아간다. 비록 지금 당신의 계절이 고단할지라도, 뿌리가 살아있는 한 다시 밀어 올릴 봄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그래서 미나리가 진정 '원더풀'한 이유는, 어떤 환경에서도 다시 살아나 끝내 주변까지 살려내는 그 회복의 생명력에 있다.
미나리는 미나리과(科) 여러해살이다. ‘물 + 나다’, 물에서 자란다는 뜻이다. 미나리가 사는 땅이 미나리꽝인데 ‘꽝’은 질척한 습지를 나타낸다. 줄기를 잘라 흙에 꽂으면 마디에서 뿌리가 나오는 영양번식을 한다.
은은한 단맛과 쌉싸름함이 겹치며 입안을 개운하게 한다. 데쳐도 형태를 유지하는 편이라, 식감이 산뜻하다. 혈압 조절, 항산화, 염증 반응 감소 등에 도움을 주며 봄·가을에 최적 성장을 한다.
꽃은 연한 줄기와 잎과는 달리 아주 작고 섬세하며, 소박한 분위기를 지녔다. 줄기와 잎이 연할 때 수확하여 꽃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