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모금의 시간

고구마

by서람


“고구마 쪄놨다. 어서 들어와서 먹어라.”


집 밖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던 나를 어머니가 부르셨다.


“밤고구마 맞아요? 물고구마 아니죠?”


먹을 게 귀했던 그 시절에도, 입맛은 까다롭게 따졌던 어린 날의 기억이다. 그만큼 고구마의 식감은 중요했다. 요즘은 고구마도 다른 작물처럼 종류가 다양해져서 입맛에 따라 골라 먹지만, 그때는 달랐다. 퍽퍽한 밤고구마와 촉촉한 물고구마 둘 중 하나였다.


그 식감의 비밀 뒤에는 고구마의 강인한 생명 서사가 숨어 있다. 흔히 감자와 비교하지만, 태생부터가 전혀 다르다. 우리가 먹는 감자는 줄기가 땅속으로 숨어 비대해진 '덩이줄기'다. 반면 고구마는 뿌리가 비대한 '덩이뿌리'이며 땅 위에서는 하트 모양의 잎과 가는 덩굴줄기를 사방으로 뻗는다. 그 모습이 언뜻 여려 보이지만, 정작 고구마가 온 힘을 쏟는 곳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 있다.

고구마는 척박하고 메마른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비옥한 땅에 심으면 잎과 줄기만 무성해지고 정작 뿌리는 빈약해질 수 있다. 품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여건이 좋다고 반드시 속이 알차게 여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족한 환경에서도 땅속에 묵직한 뿌리를 키워낼 수 있다.

잘 여문 고구마가 가을에 수확되어 뜨거운 불을 만나면, 고구마는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세상에 풍긴다. 노랗게 익어가는 고구마의 구수한 냄새는 코끝을 지나 목구멍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찐득하고 밀도 높은 맛은 입안 가득 차오르며 포만감을 준다. 그런데 물 한 모금 없이 넘기다 보면 어느새 목이 꽉 막혀오는 답답함과 마주하게 된다. 이 물리적 감각이 2015년을 전후하여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하나의 비유로 등장했다.


풀리지 않는 상황이나 무능함, 혹은 꽉 막힌 현실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고구마'라고 말한다. 반대로 이러한 답답함을 단번에 해결하는 통쾌한 화법을 '사이다'라고 부른다. 대중의 피로감과 해소 욕구가 맞물려 탄생한 특유의 신조어다.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스마트폰 시대, 사람들은 긴 갈등과 복잡한 과정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눈앞의 문제를 단번에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사이다 화법이 주목받는 이유다. 반면 고구마 화법은 답답하다는 이유로 외면받기 쉽지만, 고구마의 답답함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사이다에 없는 시간과 과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흙 속에서 뿌리를 키우고, 수확한 뒤에도 불을 거쳐야 제맛이 만들어진다. 이때 전분이 가열되면서 단맛 나는 당으로 바뀌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느끼는 고구마의 단맛에는 그렇게 익어가는 시간까지 배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글을 쓰다 막히면 원고를 덮어두곤 한다. 당장 풀어내려 애쓸 때는 막막하던 문장도 한동안 손을 놓고 있다가 다시 원고를 펼쳐보면 풀릴 때가 있다. 빨리 답을 얻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답답한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보인다. 사이다가 즉각적인 해소라면, 고구마는 답이 여물어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문득 흥미로운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고구마와 사이다를 같이 먹으면 어떨까? 선뜻 어울릴 것 같지는 않지만, 묘하게 입안의 장면이 그려진다. 퍽퍽한 고구마 한입에 사이다 한 모금. 목을 메우던 답답함 뒤로 톡 쏘는 시원함이 따라온다.


우리는 늘 사이다만 원하는 것은 아니다. 고구마를 견딘 뒤의 사이다가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답답함이 있었기에 해소가 더 선명하고, 기다림이 있었기에 단맛이 더 깊어진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목이 메도록 퍽퍽한 밤고구마를 삼킨 뒤 찾았던 물 한 모금이 떠오른다. 그때는 몰랐다. 그 한 모금이 왜 그리 시원했던가.


고구마는 메꽃과(科)이다. 뿌리채소지만, 줄기도 나물로 먹는다. 감자는 줄기의 마디에 해당하는 ‘눈’을 잘라 심으면 싹이 나지만, 고구마는 덩이뿌리 자체가 아니라 뿌리에서 돋아난 줄기(순)를 심어 재배한다. 감자와 달리 빛에 노출되어도 초록색으로 변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일본에서 전해졌으며 흉년을 대비한 구황작물로 주목받았다. 아열대 작물로 나팔꽃 같은 꽃이 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기후가 맞지 않아 드물게 개화한다. 수확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당 농도가 높아져 더 달아지며 추위에 약해 비교적 따뜻한 실온상태에 저장하는 것이 좋다.

다운로드.jpg고구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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