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
“나 오늘 미역국 먹었다.”
누군가 전화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암시하거나,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말투만 놓고 보면, 목소리가 들떠 있다면 생일이고, 가라앉아 있다면 낙방이다. 같은 말 한마디에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 내 생일날에는 밥상에 작은 예외가 하나 있었다. 평소 우리 집 밥상에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 우선이었다. 밥과 국을 놓는 순서도 그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생일날만큼은 달랐다.
어머니는 내 앞에 아버지보다 먼저 밥과 미역국을 놓으셨다. 의아했지만 그것이 내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한 끼가 생일이면 으레 누리는 특별한 대접처럼 느껴졌지만, 그날의 미역국이 다른 날과 무엇이 달랐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미역국이 어머니에게도 특별한 음식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도 나를 낳은 후 미역국을 드셨다.
생일의 미역국은 선명하게 기억나지만, 낙방의 미역국은 내 기억에 없다. 시험을 앞두고도, 시험에 떨어진 뒤에도 미역국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시험에 떨어졌다’는 미역의 미끄러운 표면에 빗댄 말이다. 붙잡으려던 것이 미끄러져 빠져나가듯, 실패를 ‘미끄러졌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미역이 미끄러운 것은 갈조류에 풍부한 알긴산이라는 식이섬유가 물과 만나 점성을 띠기 때문이다.
흙에서 자라지 않는 미역이 사람의 삶과 엮인 서사가 신기하다. 하나의 존재가 삶의 가장 기쁜 날이라 할 수 있는 생일과 가장 서글픈 날인 낙방을 동시에 상징하기 때문이다. 축하할 생일과 위로할 낙방은 삶의 서로 다른 끝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상반됨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다.
미끄러지는 것은 정말 실패와 추락을 뜻하는 것일까. 미역의 미끄러움은 다른 의미가 있다. 만약 미역의 몸통이 까칠했다면 바위와 파도에 몸이 찢어지고 부러졌을 것이다. 사람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살다 보면 거친 세상에 부딪히는 순간이 있다. 버티다가 부러지기보다, 때로는 유연하게 충격을 흡수하며 다음 기회를 모색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미역의 미끄러움이 자기 몸을 지켜내듯, 삶의 유연함도 상처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미끄러졌다’라는 표현은 그리 자조적인 속삭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딱딱한 바위틈에서 거센 바닷물에 흔들리면서도, 미역은 제 몸을 흐느적거리며 기어이 살아남았다.
미역은 산모가 먹던 치유와 회복의 음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낙방을 나타낸 미역국도 달리 생각해 볼 일이다. 실패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일지도 모른다. 기쁜 날에도, 힘든 날에도 식탁에 오르는 미역국은 다시 시작하는 자리와 맞닿아 있다.
결국 실패의 날 마주하는 미역국 한 그릇은 인생의 절망 선언이 아니다. 거친 바다에서 한 차례 미끄러진 우리에게 숨을 고르라고 건네는 위로의 음식이다. 미끄러진 자리에도 다시 시작할 여지는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생일날, 아버지보다 먼저 내 앞에 놓였던 그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이 이제야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조금은 더 알 것 같다.
미역은 해조류 중 갈조강(綱)이며 다시마목(目), 미역과(科)로 분류된다. 갈색 색소로 빛을 흡수하여 광합성을 한다. 잎⋅줄기⋅뿌리가 구분되는 육상식물과는 다른 독립된 무리이나, 역할은 채소로서 손색이 없다. 무기질이 풍부하며 특히 아이오딘(I)은 갑상선호르몬 생성에 필요한 필수 영양소로,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이유가 된다.
우리가 보는 큰 미역의 모습이 일생의 전부가 아니다. 성숙한 미역(포자체)은 포자를 만들고, 포자는 암배우체와 수배우체로 자라 각각 정자와 난자를 만들어 수정하며 새로운 미역으로 자라나는 독특한 생활사를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