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서 독해진 것이 아니다

고추

by서람


“고추가 매운맛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강의 도중 수강생들에게 던진 질문이지만, 사실 이 화두는 답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식물의 생존 전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그 서사를 펼쳐가기 위한 시작점일 뿐이다. 그래서 곧바로 설명이 이어진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매운맛을 선물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고추 역시 자기 한 몸 살아가기도 빠듯한데, 인간을 배려할 여유는 없겠지요.”


숲속 동물들은 천적을 피해 숨거나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식물은 초식동물이나 곤충 등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거나 단단한 껍질을 두르는 물리적 방어 수단과 함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방어용 화학물질을 만든다. 나무는 은은한 향기로 벌레를 쫓아내며, 어떤 풀은 천적이 먹지 못하도록 독을 품기도 한다. 고추의 매운맛 역시 ‘캡사이신’이라는 방어용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여름의 뙤약볕은 모든 생명의 기를 꺾어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유독 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몸집을 불리는 식물이 바로 고추다. 밭에서 초록 옷을 입고 이파리 사이에 몸을 숨긴 이 열매는 변신의 때를 기다린다. 장마가 지나고 찜통더위가 찾아오면 열매 속 매운맛은 한층 짙어진다.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낸 시간이 고스란히 그 안에 쌓여 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적당한 가뭄과 강한 햇볕을 받은 고추가 더 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괴로워서 독해진 결과가 아니다.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치밀한 생존 전략이 숨어 있다.

식물은 가장 힘든 순간이 오면 다음 세대를 위해 더 철저히 준비한다. 고추 역시 가혹한 환경에 처할수록 ‘씨앗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본능에 따라 캡사이신 농도를 더 높인다. 그렇게 쌓인 매운맛은 씨앗을 씹어 파괴하는 포유류의 접근을 철저히 막는 방어막이 된다.


옛날부터 체격은 작아도 야무진 능력을 지닌 이들에게는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을 빗대어 격려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의 생장보다 자손을 위해 매운맛을 채우던 고추의 생존 전략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고추의 매운맛은 그렇게 살기 위해 견뎌낸 시간의 흔적이자, 묵직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생존은 씨앗을 지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매운맛이었다면, 씨앗을 퍼뜨리는 일은 또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고추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 연출되는데, 그게 바로 색의 변화다. 문득 어린 시절에 유행했던 수수께끼가 떠오른다.

"젊을 때는 파란 주머니에 은전 열 냥을 차고 다니고, 늙어서는 빨간 주머니에 금전 열 냥을 차고 다니는 것은?“


정답은 물론 고추다. 그 시절에는 그저 웃고 넘겼던 수수께끼였다. 지금에야 그 짧은 말속에 자연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의 눈썰미가 담겨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 해학적인 비유처럼, 초록의 보호색 뒤에 숨어 매운맛을 다지던 고추는 씨앗이 단단히 여물면 비로소 몸을 붉게 물들인다. 매운맛으로 포유류를 따돌린 뒤,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새에게는 붉은색으로 눈길을 사로잡아 씨앗을 멀리 퍼뜨리려는 반전의 신호다.

풋고추가 아삭한 식감으로 식욕을 돋우는 청춘의 조연이라면, 붉게 익은 태양초는 깊은 맛을 완성하는 중년의 주연이다. 잘 여문 붉은 열매는 햇볕 아래에서 천천히 쪼그라들며 수분을 털어낸다. 말라가는 그 시간 속에서 오히려 맛은 깊어진다. 마침내 고춧가루가 되어 자신의 형태는 아낌없이 지워버리지만, 국물 속에 깊게 스며들어 음식 전체의 풍미를 살려낸다.


오늘 저녁, 깊게 우러난 찌개 국물 한 숟가락을 맛보며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내 삶의 시련을 깊은 맛으로 바꾼 적이 있는가? 나는 내 생의 절정에서 나를 지워 누군가를 기꺼이 빛내줄 준비가 되었는가?”


고추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 칼칼하고 뜨거운 여운으로 답을 대신할 뿐이다.


고추는 가지과(科)이다. 다년생 관목인 열대 지방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한해살이풀이다. 마늘과 함께 가장 많이 이용하는 향신료이다. 어원은 곧게 선 모양의 '곧추'에서 변했다는 설과, 한자 '고초(苦椒)'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같이 전해진다.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혀가 느끼는 통증이다. 뇌가 이를 감지하면, 천연 진통제 엔돌핀이 분비되어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한 상쾌함을 느끼게 한다. 고추의 매운 정도를 나타내는 스코빌 지수에 의하면 청양고추는 일반 고추보다 약 2~6배 맵고 세계에서 가장 매운 페퍼X는 1,000배 이상 맵다고 한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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