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토마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오래전부터 토마토만큼 정체성을 두고 논쟁을 불러온 식물도 드물다. 철모르던 나의 어린 시절, 친구들과 옥신각신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떤 친구는 당연히 과일이라 말하고, 또 다른 친구는 채소가 맞다고 맞섰다.
식물학에서는 꽃이 진 뒤 씨방이 자라 씨앗을 품은 열매를 과일이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토는 사과나 감, 포도와 다를 바 없는 과일이다. 반면 식생활과 농업에서의 기준은 다르다. 토마토는 나무가 아닌 한해살이풀에서 자라며, 식탁에서는 요리의 재료로 더 자주 쓰인다. 그래서 이 기준으로 보면 채소에 더 가깝다. 수박, 참외 같은 열매를 두고도 사람들이 가끔 고개를 갸웃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식물학적 기준과 생활 속 기준이 서로 달라서 생긴 논쟁이었다. 결국 둘 다 맞는다. 토마토는 두 기준이 만나는 경계에 서 있으며 과일과 채소의 성격을 함께 품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유년 시절, 어머니는 쓱쓱 썬 토마토를 접시에 담아내셨다. 그 위에 하얗게 뿌린 설탕과 함께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입안에 달콤함이 퍼졌다. 세상 어떤 고급 과일도 부럽지 않은 맛이었다. 다 먹고 남겨진 국물까지 접시를 들고 입맛을 다시던 그 시절에 토마토는 분명 과일이었다.
아이였던 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식탁 위의 토마토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붉은빛은 그대로인데, 그 붉음이 주는 온기가 달라졌다. 여전히 과일로 먹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샐러드와 볶음요리의 부재료로, 혹은 건강을 위해 주스로 갈아 마신다. 열을 가하고 으깨어질수록 몸에 좋은 성분을 더 내어주는 그 넉넉함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닮은 분명 채소의 모습이다.
과일과 채소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진 토마토를 바라보다 보니, 문득 내 삶도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나는 부모님 앞에서는 아들이었고, 선생님 앞에서는 학생이었으며, 동무들 사이에서는 그냥 친구였다. 마주하는 대상에 따라 이름도 역할도 달라졌다. 지금의 나 역시 남편과 아버지이며, 누군가에게는 스승이고 동료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의 모습만 떼어 내어 나라는 존재를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나의 삶 또한 끊임없이 위치나 역할을 바꿔온 과정이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배우는 사람에서 가르치는 사람으로 옮겨갔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다가 어느덧 누군가를 지키는 보호자가 되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존재이면서 다를 수 있다. 토마토도 어느 한쪽에 머물지 않았다. 과일이라 부르면 채소의 얼굴을 내밀고, 채소라 부르면 과일의 향기를 풍긴다. 토마토도 나도, 서로 다른 모습을 품고도 끝내 하나의 존재로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토마토는 내 식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설탕에 절여 먹던 과일이었고, 지금은 가족을 위해 정성스레 끓여내는 토마토소스가 되었다. 토마토 한 입에는 영양뿐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사랑의 기억도 함께 담겨 있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어린 날의 단맛과 지금의 깊은 맛이 입안에서 마주친다. 토마토는 그렇게 시간까지 함께 익혀 온 열매였다.
이제 토마토를 향해 과일이냐 채소냐, 마침표를 찍듯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날은 탐스러운 과일로, 또 어느 날은 든든한 채소로 제 자리를 지키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불리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익어 가는 일이다.
토마토는 가지과(科)이며 감자, 고추와 같은 가문이다. 서양에서는 항산화 성분인 붉은색소 ‘라이코펜’ 덕분에 '의사의 얼굴을 파랗게 만드는 황제'라로 불리며 건강에 탁월한 효능이 알려졌다. 지용성인 라이코펜은 세포 안에 갇혀 있는데 가열하면 밖으로 쉽게 빠져나와 체내 흡수율을 높인다. 수분이 많고 먹기 편해 우주인의 식단에도 자주 오른다.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에 전해진 초기에는 독성이 있다고 오해받아 관상용으로 재배되기도 했다. 이후 식재료로 자리 잡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채소이며 거의 모든 나라의 식탁에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