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가지 싫어. 안 먹어”
어릴 때 내 입맛은 참으로 직관적이고 단순했다. 단맛과 고소한 맛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으려 했다. 가지는 그래서 반갑지 않은 채소였다. 뚜렷한 고유의 맛도 없이 그저 겉도는 양념 맛만 느껴졌고, 씹을 때마다 입안을 맴도는 물컹물컹한 식감도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여름 밥상에는 기본 공식처럼 늘 가지가 나물무침으로 올라왔다.
밥솥에서 밥이 뜸 들기 위해 숨을 고를 무렵, 어머니는 매끄러운 생가지 몇 개를 반으로 쪼개서 밥 위에 얹으셨다. 따로 찌는 수고로움 없이, 남은 열기로 내면을 채워가는 밥과 함께 온기를 나누던 가지. 밥을 풀 때 따로 건져 올려져 양념에 무쳐지던 가지는, 내게 그저 여름날의 덤덤하고 피하고 싶은 반찬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보랏빛 조각을 식탁 구석으로 슬그머니 밀어내곤 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마주한 가지는 단순한 반찬이 아닌, 강렬한 보라색의 이미지로 먼저 다가온다. 매끈한 껍질과 짙은 빛깔 덕분에 단연 존재감이 강하다. 이 신비로운 보라색은 안토시아닌 계열의 색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건강에 좋은 항산화 물질로 대접받지만, 원래는 거친 자연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짜낸 방어 전략의 결과물이다.
식물은 천적이나 병원체는 물론, 한낮에 내리쬐는 뙤약볕조차 피해 도망칠 수 없다. 주어진 그 자리에서 모든 위협을 견뎌내야만 한다. 특히 빛의 파장 중 유해한 자외선은 식물 세포 안에 치명적인 활성산소를 만들어 내고 세포를 손상시킨다. 이때 세포의 파멸을 막기 위해 등장한 물질이 바로 안토시아닌이었다.
안토시아닌은 강한 자외선을 흡수해 세포를 보호한다. 마치 눈을 보호하는 선글라스의 색소 물질처럼, 조직의 손상을 줄여 주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생장에 장애가 되는 환경 변화가 심할수록 안토시아닌은 생산량을 더 늘려 특유의 보라색 광택이 선명해진다. 인간에게는 항산화 성분이지만, 가지에게는 뜨거운 태양을 견뎌 내기 위해 스스로 갖춰 입은 보라색 갑옷이었다.
가지의 또 다른 경이로움은 그 내부에 숨겨져 있다. 생가지를 싹둑 잘라보면 속은 의외로 아무런 빛깔도 없이 부드럽다. 스펀지처럼 미세한 빈 공간들로 가득 차 있다. 속이 텅 비어 있으니 맛 자체는 밍밍하고 심심할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 내가 그토록 가지를 멀리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가지는 바로 그 비어 있는 구조 덕분에, 세상의 어떤 다른 맛과 향을 가장 유연하게 흡수한다는 사실이다.
기름에 볶으면 고소함을 매끄럽게 머금고, 된장과 만나면 깊고 구수한 세월의 맛을 품으며, 고기와 함께 조리할 때는 육즙과 향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고집스러운 제맛을 주장하기보다, 자신을 지워내고 다른 재료들을 받아들인다. 비어 있음이 곧 풍성함이 되는 역설, 그것이 가지가 세상을 살아내는 존재 방식이다.
겉으로는 자신을 지키고, 속으로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 가지는 그렇게 자신을 지키는 단단함과 세상을 품는 포용을 한 몸에 품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의 식탁에 조용히 올랐다.
젓가락으로 짙은 보랏빛 살을 헤쳐보았다. 향긋한 양념 냄새가 그 빈속에서 뒤섞여 올라온다. 이제야 가지가 품고 있던 삶의 비결이 읽힌다. 철없던 시절, 나는 심심한 보랏빛 조각을 밀어냈지만, 이제는 먼저 집어 든다. 자연의 언어가 담겨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기에 그때는 들리지 않던 그 속삭임이, 인생의 가을쯤 도달한 지금에야 비로소 가슴으로 스며든다.
가지는 가지과(科)이다. 감자, 토마토, 고추, 까마중 등과 한 집안이다. 이들은 독성물질 솔라닌(Solanine)을 가졌으나 식용 품종은 오랜 재배와 품종 개량을 거치며 함량이 낮아져 안전한 편이다. 한의학적으로 몸을 차게 하는 성질이 있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끊임없이 개화 결실 한다. 선명한 보라꽃이 피며 특히 ‘가지는 헛꽃이 없다.’라는 말처럼 다른 채소보다 결실률이 매우 높다. 원산지는 인도로, 유럽에 전해져 오늘날 지중해 요리의 핵심 식재료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이미 다양한 조리법이 문헌에 기록될 만큼 친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