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백 냥의 거짓말

당근

by서람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온 것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면?“


믿기 어렵지만, 그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잘못된 정보가 진실의 탈을 쓰고 우리 슬롯를 오염시키는 일, 우리는 그것을 가짜 뉴스라 부른다. 그로 인해 진실이 왜곡되고 불필요한 슬롯적 비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짜 뉴스 덕분에 뜻밖에 유명해진 채소가 있다. 바로 당근이다. 도대체 당근이 가짜 뉴스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겠지만, 오래전 내가 이 주황색 채소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당근을 먹으면 눈이 좋아진다’라는 말이다. 이 믿음직한 말이 놀랍게도 가짜 정보에서 유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이다. 영국 전투기가 야간에 독일 전투기를 정확하게 격추시켰다. 영국은 당시 최첨단 기술인 레이더를 장착하여 어두운 곳에서도 적기를 찾아내는 극비 기술이 있었다. 이 기술을 숨겨야 했던 영국군은 언론에 ‘우리 조종사들이 당근을 많이 먹어서 밤눈이 밝아진 덕분이다’라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거짓 정보를 퍼뜨렸지만 그 정보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은 당근이 눈을 좋아지게 한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당근이 눈에 전혀 효과가 없을까?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시력을 좋아지게 하는 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당근(Carrot)의 이름에서 유래한 카로틴이라는 물질은 인체 내에서 비타민 A로 바뀌는데, 눈 건강에 필수적이며 부족하면 야맹증이 생긴다. 그런데 당근이 회복제가 될 수는 있으나 기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미 영양상태가 충분한 사람에게 안경을 벗게 하는 마법을 부릴 수는 없다. 당근의 본분은 좋아지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붙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입맛과 달리 내 유년의 식탁에서 당근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채소였다. 특유의 향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마치 주문처럼 반복하셨다. 눈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내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속담과 함께 꼭 먹어야 한다고 채근하셨다. 기밀을 숨기기 위해 내놓은 그 가짜 정보의 파장이 수만 리 떨어진 우리 집의 밥상까지 전해진 셈이다.

‘어릴 때 당근을 먹어서 지금 내 눈이 그나마 이 정도라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나고 보니 깨닫지만, 사실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의 바람은 시력을 높이는 마법이 아니라, 자식의 몸이 축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당근 속에 든 비타민이 야맹증을 막아주듯, 어머니의 사랑은 거친 세상을 지탱할 기초 체력을 만들어준 것이다.

여기서 당근이 지닌 침묵의 무게를 느낀다. 자신이 시력을 좋게 만든다는 오해를 굳이 정정하지 않는, 무던함이다. 그저 주황빛 몸통을 단단하게 키우며 우리 곁에 남아, 어둠을 막아내는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초인이 될 수 없는 인간을 향해, 적어도 어둠에 잠기지 않도록 지켜주겠다는 다짐처럼 말이다. 가짜 뉴스는 거짓을 퍼뜨렸지만, 당근은 그 거짓 위에서도 묵묵히 제 몫을 다했다. 그뿐이었다.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른 주황색 당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자리를 지켜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나를 붙들어준 존재들을 떠올려 본다. 평범한 오늘을 당연하게 누릴 수 있었던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그 당연함을 지켜준 덕분이다.

스마트폰의 인공광에 지친 나에게, 흙이 붙은 당근이 고요한 위로를 건넨다. 세상을 더 잘 보여주지는 못해도, 적어도 더 어두워지지 않도록 끝까지 곁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그 소박한 주황빛 하나가, 오늘 나의 어둠을 살며시 걷어내고 있다.


당근은 미나리과(科)이다. 어원은 당나라에서 온 뿌리채소에서 유래했고, 홍당무는 같은 이름이다. 겉보기에는 색깔만 다른 ‘무’ 같지만, 꽃의 모양과 향기, 잎의 생김새가 배추과(科)인 무와 전혀 다르다. 오히려 미나리를 닮은 반전 매력이 돋보인다. 주성분인 카로틴은 지용성이라 생식보다 기름에 익혀야 체내 흡수율이 높아진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최초로 전차를 개발하면서 이를 감추려고 큰물통인 탱크를 만든다고 가짜 정보를 유출했다. 레이더 개발을 숨기려 당근의 존재를 부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탱크는 전선을 누비는 신무기가 되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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