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근
“올해도 제헌절꽃을 보러 가야지”
매년 7월이 다가오면 아내와 나누는 대화이다. 여기서 제헌절꽃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말이다. 단지 우리 부부만 통하는 일종의 은어이다. 오래전 연애 시절 7월 17일에 전주(全州) 덕진공원에 갔었는데 마침 연못에 연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늘이 제일 화려하다’라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에게 제헌절은 연꽃이 가장 만개하는 날로 기억되었고, ‘제헌절꽃’이라 부르게 되었다.
매년 우리 부부를 설레게 하는 그 화려한 꽃을 보고 있으면, 세상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꽃이 딛고 있는 곳이 뜻밖에도 물 아래 진흙탕 속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 탁함 속에서 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모습 때문에, 옛 선비들은 연꽃에서 군자의 고결한 품성을 보았다. 또한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청정의 상징으로 여겼다.
연은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식물이다. 넓적한 연잎은 향긋한 밥을 감싸안고, 화려한 꽃은 차로 활용한다. 물속에 숨겨둔 연근은 반찬으로 식탁에 올라온다. 그런데 조림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채소이다 보니 흔히 놓치는 사실이 있다. 연근(蓮根)이 뿌리가 아니라 '줄기'라는 점이다. 연근은 대나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마디가 있고, 그 마디마다 눈과 싹이 나온다. 또한 마디에서는 수염뿌리가 돋아난다. 옛사람들은 땅속에 있는 기관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근(根)'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에, 땅속줄기인 연근에도 '근' 자가 붙게 되었다.
연근의 매력은 숭숭 뚫린 구멍 속에 숨어 있다. 크기는 다르지만 동글동글하게 배열된 구멍이다. 누군가는 ‘바람 든 무처럼 숭숭 뚫렸다’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 구멍은 연근이 진흙 속에서 살아남게 한 이유이다.
진흙 속은 꽉 막힌 질식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연근이 버틸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물 위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늘로 뻗은 연잎 자루 속을 비워 두었고, 그 빈 공간이 연근까지 길게 통하는 환기 통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물 아래까지 산소가 배달되었으므로 연근의 구멍은 결함이 아니라 생명의 통로였다.
식탁 위 연근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진흙과 물이 사방에서 누르는 압력을 견디기 위해 구멍과 구멍 사이의 벽을 세워 중심을 지킨다. 속을 비워 숨길을 열어둔 유연함이 경이롭다. 그 작고 둥근 통로 너머로 문득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겹쳐 보인다.
세상은 온갖 SNS로 연결되어 참 편리해졌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니 숨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 생각에 갇힌 채 '내 말이 맞아'라는 신념으로 남의 말이 들어올 틈이 없게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슬롯 구성원 간에, 또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주장만 하느라 숨구멍이 꽉 막혀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산소가 부족한 방에 갇힌 것처럼 서로를 질식시키고 있는 셈이다.
연근은 우리에게 말 없는 잔소리를 건넨다. 삶이란 내 생각으로만 채운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연근이 짓누르는 압력을 견디면서도 속을 비워 두었듯, 우리 마음에도 타인의 숨결이 오갈 수 있는 빈 구멍 몇 개쯤은 뚫어두어야 한다. 내 생각과 조금 달라도 ‘그럴 수 있다’라고 받아들이는 여백, 상대방이 마음을 털어놓을 때 가만히 들어줄 수 있는 통풍구 같은 자리 말이다.
지구온난화로 개화 시기가 다소 당겨졌지만, 올해도 우리 부부는 어김없이 전주로 향할 것이다. 초록 잎사귀 사이로 고고하게 핀 제헌절꽃을 마주하며 감탄의 셔터를 누르겠지만, 아마 꽃보다 다른 데로 시선이 쏠릴 것 같다.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 진흙 속에서 온몸을 비워 숨을 이어온 연근의 구멍들이다. 연꽃보다 더 깊게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연(蓮)은 연꽃과(科)이다. 물 위로 뻗은 긴 대는 잎자루와 꽃대이다. 잎 표면에는 미세돌기가 있어 물방울이 밀착하지 못해 굴러떨어지는 '연잎 효과'를 나타낸다. 이러한 발수현상이 방수 산업에 활용되고 있다. 연근을 자르면 흘러나오는 끈끈한 다당류는 예로부터 위 건강에 좋다고 여겨져 왔다.
수련(睡蓮)은 이름과 모양이 연과 비슷하지만. 분류상 가문이 다르다. 잎이 물 위에서 자라는 연과 달리 수련은 물 표면에 떠 있다. 많은 수련은 밤에 꽃을 오므리기 때문에 '잠잘 수(睡)' 자를 쓴다. 우리가 먹는 연근은 수련이 아니라 '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