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서양의 샌드위치에 견줄 만한 한국인의 간편식은 단연 김밥이다. 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을 만큼 간편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재료만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무엇을 넣고 뺄지를 고민하는 사이 김밥 한 줄은 어느새 취향의 격전지가 된다. 그중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자리를 차지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재료가 바로 오이다. 그런데 오이는 제법 치열한 호불호의 심리전을 끌어낸다. 반대파와 옹호파의 시선은 흥미롭게도 온도 차가 확연히 다르다.
오이는 여름철 쉽게 상하는 시금치의 대안으로 등장했다. 단무지와는 결이 다른 아삭함과 개운함, 초록이 주는 시각적 효과까지 갖췄다. 특유의 싱그러운 향은 김밥 전체의 풍미를 끌어올릴 수 있다. 반면 오이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이 향은 거북한 비린내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배어 나와 밥이 눅눅해지고, 가끔 느껴지는 특유의 쓴맛도 반갑지 않다.
그 엇갈린 평가를 뒤로하고 오이의 본모습을 보기 위해 나의 시골 텃밭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지지대에 주렁주렁 매달린 오이를 만지면 야무지다. 그런데 손끝에 닿는 미세한 가시는 제법 까칠하다. 마치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듯 날이 서 있다.
오이는 왜 껍질에 날카로운 가시를 세워야 했을까. 속살의 실체를 알게 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이 몸통의 95% 정도는 물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마치 물줄기가 세워져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연약함을 지켜내기 위해 최소한의 경계병인 가시를 세운 것이다.
비단 자연의 이치만 그런 게 아니다. 눈을 돌려 사람을 바라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상살이에도 오이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겉으로는 가시 돋친 말을 내뱉지만, 속은 쉽게 상처받고 마음이 무른 이들이다. 자신이 가진 순수함을 지키려고 스스로 까칠하게 무장한다. 그 까칠함 뒤에는 지키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출렁이고 있는 셈이다.
이번에는 가시를 털어낸 오이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영양이 꽉 찬 뿌리채소에 비하면 얼마나 싱거운 존재인가? 변변한 탄수화물도 거의 없다. 그저 무던하게 물만 채운 채 채소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신기하다.
우리는 흔히 ‘알찬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머리는 지식으로, 일상은 빽빽한 계획으로 채워야 안심한다. 조금이라도 비어 있으면 무언가를 더 채우려 애쓴다. 그러나 오이의 최고 강점은 ‘싱거움’이다 그 무던함 덕분에 어떤 양념과도 기꺼이 어울린다. 고춧가루를 만나면 소박이가 되고, 식초와 설탕을 만나면 피클이 된다. 심지어 볶아도 특유의 청량함을 잃지 않고 주변 재료의 맛을 돋운다. 자기 맛을 비워두었기에 다른 맛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태도와도 닮아있다. 확신으로 꽉 찬 사람은 타인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지만, 오이처럼 적당히 싱거운 사람은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유연하게 화합할 수 있다. 싱거움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품을 수 있는 여백이다. 여백이 있기에 다른 것이 들어설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싱겁다는 말이 존재감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하지만 오이의 싱거움은 자기 상실이 아니라, 넉넉한 바탕색에 가깝다. 제 안에 맑은 물줄기를 굳게 세우고 있는 것이지 줏대 없는 비어 있음이 아니다. 고요한 비움이기에 그 싱거움은 품격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내 안의 단단함을 녹여내고, 그 자리를 맑은 수분으로 채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젊은 날, 나 또한 무언가를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비어야 더 담을 수 있고, 싱거워야 세상의 다양한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른 오이 한 조각을 씹으며 그 청량한 수분을 음미해 본다. 내 마음도 딱 오이만큼만 비어 있었으면 좋겠다. 겉으로는 자존감의 가시를 세워 자신을 지키되, 안으로는 넉넉한 싱거움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싱거워도 괜찮다, 아니 싱거워서 더 좋다’라고 전하는 오이의 위로가 입안 가득 번진다.
텃밭의 오이를 다시 바라본다. 가시는 여전하고, 안은 여전히 물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래도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이는 박과(科)이다. 나무처럼 서지 못하는 대신 빛을 받기 위해 덩굴손을 펼쳐 땅바닥으로 퍼지거나 주변을 붙잡고 올라간다. 꽃은 노란색 별모양이다.
복잡한 손질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편의성을 갖춘 채소이다. 오이냉국은 무더위를 이겨내는 여름철 대표 음식이며 오이지는 계절과 관계없이 밑반찬의 기본이 된다. 풍부한 수분과 칼륨이 갈증 해소를 도와 등산 시 간식에 적합하고 보습 효과가 좋아서 피부 미용에도 활용된다. 100g당 칼로리가 채소 중 최하위권이다. 많이 먹어도 아삭한 식감과 수분 덕에 포만감을 주니 체중 감량도 효과적이다.